아버지는 한남동, 아들은 청담동으로

[재벌家 이야기] 그들이 사는 동네

2012-07-31     강길홍 기자

[일요서울ㅣ강길홍 기자]  대한민국 상위 0.1%의 재벌들이 사는 곳은 어디일까? 재벌 총수들은 전통적으로 한 동네에 모여 살면서 부촌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들이 사는 곳은 일반인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자리한다. 1960년대의 재벌 1세대는 주변 환경이 쾌적하면서도 사생활 보호를 위해 한적한 곳을 선호했고, 서울 성북구 성북동이 가장 알맞은 곳으로 꼽혔다. 1세대가 성북동에 터를 닦았다면 2세대는 한남동으로 부촌 지역을 확장했고, 3~4세대로 넘어오면서 강남에 새로운 부촌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특히 이들은 살고 있는 자택 주변의 토지·건물까지 싹쓸이 하는 유별난 ‘땅사랑’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들이 사는 동네를 살펴봤다.

성북동·한남동에서 시작된 부촌의 역사…강남으로 확장중
멈출 수 없는 땅사랑… 자택 주변 건물까지 ‘닥치고’ 매입

서울 성북구 성북동, 종로구 평창동, 용산구 한남동은 전통적인 부촌으로 손꼽히는 지역이다. 특히 재벌 총수를 비롯해 정·관계 인사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일반인들은 좀처럼 찾기 힘든 동네가 됐다. 특히 성북동은 1960년대부터 ‘재벌家 동네’의 대명사가 됐다. 재벌 총수들이 이곳에 모여든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서울 중심지로의 접근성이 뛰어나고, 풍수지리로 봤을 때 명당으로 손꼽힌 점이 재벌家를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북동·한남동에는 주한외국대사의 관저들이 많아 삼엄한 경비가 이뤄지면서 일반인들이 출입을 꺼리게 됐고, 이 때문에 사생활 보호를 중요시하는 재벌들이 모여들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성북동에서 태동한 ‘재벌家 동네’

1970년대 들어 성북동에는 현대, 삼성, LG 등 재계 서열 수위를 다투는 재벌가의 자택이 앞다퉈 세워졌다. 특히 성북동에는 아직까지도 현대家 출신들이 많이 남아 있다.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이 두 아들인 정지선 회장, 정교선 사장과 함께 살고 있고,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을 비롯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성북동 주민이다.

구자경 LG 명예회장과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이수영 OCI 회장, 이웅렬 코오롱그룹 회장,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등도 성북동을 지키고 있다. 재벌들이 많이 살다보니 성북동 일대에는 유명 고급음식점을 비롯해 초호화 요정이 적지 않았다. 지금은 길상사로 바뀌었지만 고급 요정의 대명사였던 대원각이 자리한 곳도 성북동이었다.

하지만 재벌 2~3세로 내려오면서 성북동의 인기는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면 한남동 일대는 성북동을 넘어서는 재벌家 동네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특히 하얏트호텔과 리움미술관 사이의 길목은 삼성家 집성촌으로 불릴 정도로 삼성 출신들이 많이 산다. 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장충동과 한남동 일대에서 터를 닦았는데, 그룹의 경영권을 물려받은 이건희 회장은 한남동에서, 삼성家의 장손인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장충동에 살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이건희 회장이 2005년부터 살고 있는 이태원동 자택은 면적만 2133㎡(645평)에 달한다. 이 회장의 집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이태원동이지만 사실상 한남동으로 인식되는 곳이다. 이 회장은 이곳에 자리를 잡은 뒤 주변 땅을 꾸준히 사들이는 유별난 땅사랑을 보여줬다. 자택 주변을 비롯해 승지원 건너편, 태국 대사관저 주변 건물 등 10여 차례에 달하는 부동산 거래를 이어가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자택 주변에는 신춘호 농심 회장과 신동익 농심 부회장, 신동원 농심 대표, 신동윤 율촌화학 회장 등 농심家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 이 회장은 2005년 이곳으로 이사하면서 이웃인 신춘호 회장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이 회장의 자택 신축과정에서 신 회장이 조망권을 침해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결국 이 회장이 신 회장의 자택을 매입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이밖에도 정몽진 KCC 회장, 정몽석 현대종합금속 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등도 이건희 회장의 이웃이다.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 아들 정용진 부회장, 딸 정유경 부사장도 이건희 회장 자택 부근의 땅을 대규모로 보유하고 있다. 이명희 회장의 땅은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과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을 이웃으로 두고 있다. 이명희 회장도 오빠인 이건희 회장과 마찬가지로 이웃과 송사를 벌인 것도 재밌는 점이다. 2009년 이중근 부영 회장의 2층 자택 앞에 이명희 신세계 회장이 신축 공사를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중근 회장이 자신의 집 앞에 짓는 이명희 회장의 주택 공사를 중지시켜 달라며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냈고, 서울서부지방법원이 가처분 신청 인용 결정을 내렸다. 결국 이명희 회장은 당초 2층까지 올릴 예정이던 공사를 이미 진행된 1층에서 마무리지어야 했다.

정유경 부사장도 2007년 전후로 꾸준히 이명희 회장 자택 인근의 땅을 매입하면서 현재는 어머니보다 많은 땅을 소유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용진 부회장도 한남동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또한 이건희 회장의 처남인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도 2010년 11월 한남동에 건물을 매입해 보유하고 있다.

삼성家의 한남동 부동산 매입이 이어지면서 인근의 제일모직과 리움미술관을 잇는 대로는 삼성이 운영하는 꼼데가르송 플래그십숍을 본뜬 ‘꼼데가르송 길’로 불리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서초동 삼성타운과 별개로 ‘또 하나의 삼성타운’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LG도 한남동에 ‘타운’ 형성

삼성과 영원한 라이벌인 LG家도 한남동에 모여살고 있다. 재계 라이벌인 이들이 한남동에서 땅매입 경쟁을 보여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구본무 회장은 2005년까지 유엔빌리지에 있는 한남1동 단독주택에서 살다가 한남2동으로 이사했다. 당시 13년가량 살아온 한남동 단국대 뒤편 자택이 90여 평 규모의 단층구조로 집안 대소사에 가족들이 모이기에는 상당히 비좁아 이사를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2002년 LG전자로부터 부지를 매입한 구 회장은 이후 1680㎡(508평) 규모의 자택을 새로 지었다.

LG家의 수장인 구 회장이 한남동에 자리를 잡자 LG家 출신의 한남동 진입이 줄을 이었다. 구자훈 LIG그룹 회장이 2005년 구본무 회장 자택 인근의 부지를 매입한 뒤 두 딸인 현정씨와 윤정씨에게 증여했고, 윤정씨가 이곳으로 이사했다. 구본상 LIG넥스원 대표도 2006년 이태원동 건물을 매입한 바 있고, 지난해 7월에는 구본무 회장의 장남 광모씨도 한남동에서 저택을 매입했다. 또 구자학 아워홈 회장의 자녀인 본성씨와 미현씨, 지은씨가 한남동의 건물 한 채 지분을 나란히 보유하고 있다. 구자학 회장의 부인인 이숙희씨는 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딸이다. 이씨는 현재 이건희 회장과 상속재산 분쟁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재계 2위의 현대차그룹을 이끄는 정몽구 회장도 한남동의 오랜 주민이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 허영인 SPC그룹 회장,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 임창욱 대상그룹 회장 등도 한남동 ‘이웃사촌’으로 통한다. 자수성가한 재벌총수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도 한남동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강남으로 내려가는 젊은 오너들

재벌 3~4세로 내려오면 재벌家 동네도 서서히 이동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지역이 강남구 청담동이다. 청담동은 재벌 3~4세의 주거지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이다. 이들의 강남행은 과거와 달리 개방적인 사고를 갖게 되면서 한적한 성북동·한남동보다 생활 편의성과 최신 트렌드의 문화가 앞서는 지역을 선호하는 성향이 반영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청담동 주민 가운데 대표적인 재벌家 인사는 구본준 LG전자 부회장, 정몽진 KCC그룹 회장, 조원국 한진중공업 상무, 임창욱 대상 명예회장의 딸인 임세령 와이즈앤피 대표 등이다.

강남구 도곡동도 청담동과 비슷한 이유로 새로운 재벌家 동네가 되고 있다. 특히 2005년 들어선 초호화 아파트 타워팰리스는 부의 상징으로 인식되며 재벌家를 불러들이고 있다.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이 대표적이다. 조 회장은 성북구 성북동에 살다가 2010년 타워팰리스로 이사해 도곡동 주민이 됐다.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도 종로구 신문로에 살다가 도곡동으로 이사했다.

한편 지난해 재혼한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경기도 서판교에 신혼집을 마련해 관심을 모았다. 정 부회장이 서판교에 자리를 잡으면서 이 지역이 새로운 부촌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주로 총수일가보다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이 지역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교통 여건이 뛰어난데다 용적률과 인구밀도가 낮아 주거환경이 쾌적한 것이 원인으로 꼽힌다.

청담동에서는 삼성家 집안싸움

청담동의 상업지역에서는 삼성家의 집안싸움이 활발하다. 이건희 회장과 이명희 회장의 땅매입 경쟁이 전쟁을 방불케 하면서 관심이 집중됐다. 갤러리아백화점에서부터 청담동사거리까지는 ‘명품 거리’로 유명하다. 국내 유통되는 대부분의 해외 유명 브랜드가 이곳에 매장을 열었을 정도다. 이 때문에 패션사업을 벌이고 있는 삼성과 신세계의 집중 타깃이 된 것으로 보인다.

포문을 연 쪽은 신세계다. 신세계는 2001년을 시작으로 청담동 79번지 일대 부동산을 차례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명의는 대부분 신세계인터내셔널 또는 이명희 회장과 딸 정유경 부사장이었다. 신세계는 이 일대를 차례로 사들이며 ‘신세계타운’을 완성하는 듯 했다.

그런데 2008년 12월 이건희 회장이 훼방을 놓았다. 신세계인터내셔널이 소유한 건물의 바로 옆 건물을 사들인 것이다. 이 회장은 당시 주변건물 시세의 2배 이상을 지불할 정도로 급박하게 매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뒤이어 이 회장이 78번지에 건물을 매입하자 신세계가 반격하듯 바로 뒷 건물을 매입하며 경쟁을 벌였다.

이같은 경쟁은 청담동 골목길에서도 이어졌다. 1990년대부터 이 지역에 건물을 가지고 있던 이명희 회장과 정용진 부회장, 정유경 부사장이 2004~2010년 사이에 추가로 부동산을 사들이면서 타운을 형성해 나갔다. 그런데 2010년 임세령 와이즈앤피 대표가 건물을 매입하고 주소지를 옮겼다. 임 대표는 앞서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과 이혼한 바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롯데家도 청담동 주변 부동산 매입에 열심이다. 신격호 회장이 장녀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과 관련된 회사인 유니엘(신영자 롯데쇼핑 사장의 아들 장재영씨가 지분 소유한 회사), S&S인터내셔날(신영자 사장이 설립한 회사) 등을 비롯해 신영자 사장의 딸 장선윤 블리스 대표가 이 지역에서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
재벌家의 땅매입이 경쟁적으로 이뤄지면서 청담동은 주변시세가 평당 1억 원 수준에서 최고 3억 원까지 치솟았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대부분의 지역에서 거래가 올스톱된 상황이지만 청담동에서는 매물이 나오기만 하면 재벌家가 몰려들면서 여전히 호황이라는 전언이다. 이 지역에서 만큼은 부동산 경기 침체는 ‘딴나라’ 얘기가 되고 있다.

재벌家의 청담동 땅매입 경쟁의 가장 큰 이유는 이곳에 명품 매장이 집중되면서 대한민국 최상위 상권을 형성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삼성과 신세계 모두 향후 명품 사업을 진행하면서 이곳에 매장을 열기 위해서는 미리 건물을 사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루이비통코리아와 구찌코리아도 2000년과 2001년 청담동 일대 부동산을 직접 매입한 바 있다.

한편 삼성·신세계의 청담동 땅매입 경쟁이 손쉬운 부의 대물림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건희 회장이 매입한 청담동의 한 빌딩에는 현재 이 회장의 차녀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이 수입한 명품브랜드 토리버치 매장이 운영되고 있다. 아버지가 매입한 빌딩에서 자녀가 명품 브랜드를 수입해 팔고 있는 것이다. 패션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신세계인터내셔널도 이명희 회장의 딸인 정유경 부사장이 진두지휘하고 있다. 결국 땅매입 경쟁의 원인은 오너 3세의 향후 사업기반 확보를 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 비판이 쏟아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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