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秘파일’을 까면 너희도…”
2005-08-23 홍성철
이들 권력2인자들은 당시 대통령을 대신해 막후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둘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들 2인자들은 각종 대형게이트에 연루된 혐의로 영어의 몸이 되는 등 권력의 비정함을 몸소 체험하기도 했다. 최근 발간돼 화제가 되고 있는 ‘박철언 회고록’은 그 내용의 진위 여부를 떠나 정치권의 권모술수와 권력의 속성, 권력 2인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등을 잘 대변하고 있다. 특히 2인자는 막강한 권력을 쥔 만큼 정치적 부담 또한 스스로 떠 안아야 했고, 퇴임후 자신과 그 주군을 보호하기 위해서 안전장치로 적지 않은 X파일을 비축하고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과거 권력2인자의 이러한 역할과 권력의 속성을 감안하면 6공화국 황태자였던 박철언 전 의원 외에도 상당수 과거 2인자들도 권력내부의 비밀 파일을 확보하고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정치권 일각에서 현 정권의 과거사 청산 카드에 맞서 ‘역X파일’ 개봉설이 나돌고 있는 것도 이러한 관측과 맞물려 있다.
권노갑 X파일 여권 초긴장
‘역 X파일’과 관련해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인사는 다름 아닌 DJ정부 시절 막후 실력자였던 권노갑씨. 권씨는 DJ정부 때 정치자금과 조직을 관리하는 등 실질적인 2인자로 군림했다. 특히 권씨가 2002년 초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막후에서 지원했고, 본선인 대선정국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은 노 대통령과 현 정부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하다.2002년 3월부터 16개 시도를 순회하며 치러진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한 후보자는 노 대통령을 포함해 모두 7명이었다. 이중 김근태·유종근 후보는 제주와 울산 경선 직후 사퇴했고, 한화갑(대전 경선)·김중권(강원 경선)·이인제(부산 경선) 후보 등도 뒤따라 레이스를 포기했다. 마지막 서울 경선까지 완주한 후보는 노 대통령과 정동영 통일부 장관 두 사람 뿐이었다.문제는 두 사람이 경선을 치르면서 쓴 정치자금. 당시 민주당이 집권당이었고 경선 규모 등에 비춰볼 때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갔을 것이란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실제로 김근태 장관은 불법 경선자금에 대해 양심고백을 하기도 했고, 노 대통령과 정 장관도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경선을 치를 수 없었다”는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다.따라서 당시 권력 실세 중 누군가는 경선 및 대선자금 비밀을 파악하고 있고, 그와 관련한 비파일을 보관하고 있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또 그 ‘누구’란 DJ의 오른팔이자 정치자금을 관리했던 권씨일 가능성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권씨는 지난해 언론과의 옥중 인터뷰에서 “내가 입을 열면 현 정부 핵심인사들이 치명타를 입게 된다”고 주장하는 등 X파일 존재 가능성을 시사했다.주군인 DJ와 노 대통령과의 정치적 이해관계 등을 감안해 파일 공개를 유보하고 있을 뿐 언제든 그가 핵뇌관을 터뜨릴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특히 고령의 나이로 힘든 옥살이를 감내하고 있는 권씨가 은근히 기대했던 8·15 대사면 대상에서 제외됐고, 도청 사건으로 대로한 DJ가 아직 노기를 풀지 않고 있다는 현실은 핵뇌관 개봉설을 부추기고 있다.
궁지 몰린 과거 2인자 역공 준비
JP도 적지 않은 X파일을 비축하고 있을 대표적인 인사로 지목받고 있다. JP는 ‘영원한 2인자’라는 애칭이 붙어 다닐 정도로 박정희 정권부터 40여년 권력의 한 축을 형성하며 권력의 향유를 만끽했다. JP가 비록 지난해 4·15 총선에서 낙선한 후 정계를 은퇴하긴 했지만 DJ·YS와 함께 40여년 ‘3김 시대’를 이끌었다는 사실은 그 또한 정치자금 등 상당한 비파일을 간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실제로 지난해 5월 JP가 2002년 6·13 지방선거 당시 삼성에서 채권 15억원을 수수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자 정치권 주변에선 ‘JP 비파일 공개설’이 나돌기도 했다. 당시 JP의 측근인 유운영 전 자민련 대변인은 “JP를 사법처리 하려면 DJ와 YS는 물론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자금도 다 사법처리 해야 형평에 맞을 것”이라고 주장했다.JP의 또다른 측근은 “JP가 입을 열면 정치권의 비사가 줄줄이 터져 나올 것이고, 노 대통령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처세술의 달인’답게 정계은퇴 후 극도로 정치적 언행을 자제하고 있는 JP지만 폭로정국이 확전되면서 과거사 청산 작업이 본격화될 경우 자신의 정치적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비파일을 꺼내들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된다. 정치권 일각에선 JP가 회고록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리도 나돌고 있다. 아직 확인되진 않았지만 JP의 회고록에는 ‘박철언 회고록’ 보다 더 충격적인 내용이 담길 것이란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도청 파일 사건과 ‘박철언 회고록’ 출간으로 코너에 몰린 5공 및 YS정권 실세들도 반격 카드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세동씨를 중심으로 한 5공 세력과 김현철씨를 정점으로 한 YS정권 실세들이 폭로정국에 더 이상 희생양이 되지 않겠다며 비축한 X파일 공개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후문. 현 정권이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정국 반전 및 집권 후반기 주도권 장악을 노리고 있는 만큼 과거 정권 2인자 그룹도 정면 대결 카드로 주군 및 자신들의 정치적 명예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는 분위기다. 폭로정국이 전·현 권력간의 치열한 서바이벌 게임으로 비화될 조짐이 일고 있는 여의도 정가는 지금 그야말로 폭풍전야에 휩싸여 있는 형국이다.
#‘포스트 노무현’ 바로 나… 치열한 각축전
노무현 정권에서 권력 2인자는 누구일까. 과거 정권과 마찬가지로 현 정권에서도 권력 2인자 경쟁은 수면 아래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우선 노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좌하고 있는 청와대 문재인 민정수석과 김병준 정책실장이 2인자 경쟁을 펼치고 있다. 특히 ‘왕수석’으로 통하는 문 수석은 노 대통령과 82년부터 변호사 사무실을 함께 운영하며 민주화운동을 전개해 온 동지이자 절친한 친구사이다. 권한과 역할은 차치하더라도 문 수석에게 노심(盧心)이 가장 많이 실리고 있을 것이란 관측이 중론이다.김 실장 역시 문 수석 못지 않게 노 대통령의 두터운 믿음과 신뢰를 얻고 있다. 김우식 비서실장 사의표명 이후 김 실장이 후임 비서실장 1순위로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에 대한 노 대통령의 애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각료 중에서는 실세 총리로 자리매김한 이해찬 총리,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천정배 법무장관이 2인자 후보군으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세 사람은 나름대로 대망론을 꿈꾸고 있는 만큼 2인자 부상으로 인한 부메랑을 우려, 권력 싸움에서는 한 발 비켜 서 있는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다.당에서는 참여정부 초대 청와대비서실장과 대통령 정치특보를 역임한 문희상 의장과 PK(부산·경남) 사단 대표격인 김혁규 상임중앙위원이 2인자 멤버로 꼽히고 있다. 노 대통령 핵심 측근그룹인 염동연 의원과 이강철 시민사회수석도 2인자 경쟁 대열에 적극 합류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어려운 시절 정치역정을 함께 했던 이 두 사람에 대해 여전히 변함없는 애정과 신뢰감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