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우 전 의원이 본 정치 30년 3당 합당편 ② - 황금 분할이 남긴 것은
5공 스타 3인방 노무현·김동주·김봉호
2011-02-15 장경우 전 국회의원 기자
13대 국회가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치 봇물 터지 듯 한꺼번에 모든 문제가 국회로 몰려오기 시작 했다. 5공화국 출범부터 시작해서 8년 동안의 일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 였다. 예컨대, ‘5·18 진상조사’에 있어서의 특별위원회 부터 ‘삼청교육대’, ‘해직자들의 복직’, ‘언론 통폐합’ 문제 등 을 비롯하여 그 무성한 소문속에 있었던 ‘전두환 정권’시절의 모든 것들. 다시 말해 무수히 정가를 떠돌던 비리, 의혹 사건 등을 조사하기 위한 각종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진상조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야당들의 공통 된 요구 사항이었다.
당시 언론이나, 민심도 이를 반영하고 있었다. 결국 여당은 야당과 우선 급한 것부터 처리하자는데 합의를 하였다. 제일 먼저 쉽게 합의 된 것이 ‘지역감정 해소 특별위원회’였다. 이것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지만 정치권의 고질적인 병폐이고 단시일에 해결될 일은 아니더라도 그렇다고 등한시 할 수만은 없는 문제 였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합의 된 것은 ‘광주사건 특별 조사 위원회’였다. 이 역시 다소 진통은 있었으나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그 진상이야 어떻던 ‘광주사건’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평민당 문동한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데에도 큰 문제없이 합의되었다.
정작 제일 큰 문제는 ‘5공화국 있어서의 비리조사 특별위원회’였다. 이런 명칭이 나오기까지의 진통은 정말 대단했다. 야당측에서는 ‘5공비리조사특위’라는 명칭을 고집했다. 그런데 여당은 “5공은 다 비리냐?”며 합의가 이루어 지지 않았다. 결국 5공화국의 비리만 조사한다는 뜻에서 결정한 그 긴 이름 ‘5공화국 있어서의 비리조사 특별위원회’라는 명칭으로 결정 되었다. 정작 나중에는 워낙 이름이 길다보니 ‘5공비리특위’가 되고 말았지만 아무튼 공식 명칭은 여전히 ‘…있어서의…’가 포함 되었다. 결국 있어서의 토씨 하나 때문에 아주 긴 시간(일주일이상)을 보내야만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올만 하다.
동시에 이 특별 위원회에서 국정 조사권과 청문회의 권한도 함께 탄생 된 것이다. 결국 유신때 소멸 되었던 국정 조사권이 ‘여소 야대’ 정국에서 부활 된 것이다. 그리고 조사 활동의 하나로 도입 되었던 것이 이른바 청문회였으며, 당시 이 청문회는 국민들의 TV시청률 1위일 뿐만 아니라, 가정은 물론 직장에서 조차 TV에 매달려 일손을 놓고 잠을 설친 사람들도 엄청 많았다.
1988년 그해는 바로 올림픽이 있었다. 전세계인들의 축제와 관심속에 열리는 긴 행사 기간 동안 국민화합 차원에서 국회도 잠시 국정 조사를 미루자는데 합의를 했다. 결국 각 위원회는 올림픽대회 기간 동안 내부조사 계획과 자료 수집만을 하면서 그 무더운 여름을 보냈다.
마침내 88올림픽이 끝났다. 그런데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언제 축제가 있었나 싶게 바로 10월부터 각 특별위원회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 졌고, 이른바 ‘청문회’가 시작 되었다. 몇 날 몇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많은 국민들이 TV앞을 떠나지 못했던 바로 그 청문회였다. 국민들의 상당수는 아마 지금도 당시의 청문회 중계방송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벌써 23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간혹 당시의 필자를 알아보는 분도 계시니 말이다.
그러나 정말 내부에서 그 청문회를 준비 해야 했던 여야 의원들은 밤잠을 설치는 것은 물론이고 자료 수집과 증인 채택 등 사전 준비에 엄청난 고생을 했다. 당시 민정당 의원실장과 부총무를 겸하고 있었던 필자에게 또 하나의 직책이 떨어졌다. ‘5공 조사 비리 특위 위원’으로 활동할 뿐만 아니라 ‘간사’자리까지 맡으라는 것이었다. 그야 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각종 특위 활동에 관한 의원들의 활동 내용 보고는 물론 의원실에 해야 할 일들도 많은데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매일 열리는 각 특위의 활동을 녹화 테잎을 통해 모니터하여 당에 대책 보고를 해야 하니, 당시 업무에 대한 책임을 다하느라 이중삼중고를 치러야만 했다.
특히 ‘지역감정해소특위’나 ‘광주사건진상조사특위’는 처음에는 열을 올리는 듯 했으나, 너무 뻔한 결과 인지 국민적 관심이 떨어지면서 ‘5공비리조사특위’의 증인 청문회에 국민적 관심이 더욱 높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5공비리조사특위’위원장은 이기택 의원(당시 통일 민주당 부총재, 현 평통 수석부의장)이었다.
야당 의원으로는 노무현 의원, 김동주 의원, 김봉호 의원 등 야당 대표선수(?)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바로 이 중요한 위원회에 ‘여소야대’ 여당측 간사를 맡았으니, 얼마나 답답했는지 정치를 안해본 사람은 잘 모를 것이다. 이토록 바쁘고 긴장하며 의원생활을 했던 기억은 의원생활 10년을 통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어찌됐던 당시의 인연으로 훗날 이기택 총재(당시 민주당 총재)님의 고언으로 민주당으로 옮겨 본격적인 야당 의원 생활도 경험하게 되었다. 청문회를 시작하기전 민정당 소속 청문회 의원들은 내부 회의를 통해 각종 사건 내용의 진상을 밝히는데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특히 ‘일해재단’ 문제와 관련해서는 증인으로 채택된 장세동씨(5공 당시 안기부장), 안현태(전 대통령 경호실장), 허화평씨(전 의원) 등 5공 실세들을 증인으로 채택하여 심문 하기도 했다.
당시 야당 청문회 의원들 중 노무현, 김동주, 김봉호 의원 등은 증인들이 답변에 난감해할 정도로 세차게 몰아세운 대표적 의원들이다. 증인들은 이 의원들만 발언을 하면 당황하기가 일쑤였다. 아무튼 청문회가 연일 화제를 불러 모으며 정국을 뒤 흔들고 있었다. 여당 의원으로써 이 청문회 정국을 헤쳐 나간다는 것은 야당 의원들에 비해 배가 힘든 일이었다. 여당이다 보니 청와대와 집권권력층에 관련된 문제가 나오면 걱정 수준에서 이것을 피해가도록 해 달라는 말 못할 주문도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들어 왔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야당 의원들이 그리 만만한 사람들인가? 뭔가 무마를 시키려 해도 “진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수 있것일 텐데 정작 ‘문제’는 여당 의원들이 그 “진짜(실체)”가 무엇인지 알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는 것이다. 일단 여당은 야당에 비해 정보에 뒤쳐질 수 밖에 없었다. 광주 문제건 5공비리 문제건 간에 피해자들은 정보를 결코 여당에 주지 않았다. 어찌보면 그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당시 국민들이나 당사자들은 “여당이란 진실을 파헤치기보다는 뭔가 자꾸만 덮어두려고 하는 사람들이다”라는 인식이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중요 자료들은 여당보다는 야당으로 흘러 들어 갔다. 그러다 보니, 여당 의원들은 증인심문때마다 “당하기” 일쑤였다. 도대체 야당의원들은 저런 내용들을 어디서 다 알아낸 걸까? 생전 들어보지도 본 적도 없는 자료들이 야당 의원들 한테서 마구 쏟아져 나왔다. 조금 잠잠해졌다 싶으면, 느닷없이 “증인은 이 자료 보이지 않습니까?”라고 호통치면서 자료가 든 봉투를 내밀었다. 그 자료들 속에는 정말 놀라울만한 내용들이 있었다.
[장경우 전 국회의원] kwa815@naver.com
프로필
●1942년 4월 12일생
●경기중·고/고려대 경영 졸
●대한축구협회부회장
●대한수영연맹 명예회장
●제 11·13·14 국회의원
●한국캠핑캐라바닝연맹 총재(현)
●세계캠핑캐라바닝연맹 아·태 지역위원회 의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