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초대석] 박근규 부회장 “고엽제 2세 환자, 가슴이 찢어진다”
[일요서울 | 서원호 취재국장] “고엽제 2세 환자들을 보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2세 환자는 파악된 사람만 89명이 됩니다. 그 가운데 어느 2세 환자는 이제 나이가 30세가 넘었는데, 잇몸도 없이 태어났습니다. 잇몸이 없으니 당연히 이도 없어 음식물을 씹을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 서울 삼양동에 살았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가족들로부터 외면을 당해 노숙자가 되고 난 뒤 저희 관리망에서 이탈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은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박근규 부회장(70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눈시울을 붉혔다.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깊은 숨을 몇 번이나 내쉬고서야 다소 마음의 평정을 찾은 듯이 다음 말을 이어갔다. [일요서울]은 박 부회장과 인터뷰하는 동안 박 부회장이 살과 뼈 속 깊숙이 자리 잡은 고엽제 환자들의 통한과 교감하는 느낌을 받았다. 박 부회장에 따르면 월남 파병은 1964년 7월 18일부터 1973년 3월 23일까지 자원병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가난한 병사들이 주로 자원병으로 나섰다. 귀국 후에는 사회적응도 만만치 않았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경제적인 생활수준과 사회적 지위마저 좋지 않았다. 게다가 몸의 이상질병은 사회적응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렇다보니 가정적으로는 자랑스러운 아빠도, 믿음직스러운 남편도 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국가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세계 평화와 자유를 수호한다’는 자랑스러운 월남 참전이 귀국 후의 현실에서 그 어떤 뿌듯한 긍지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단체 조직화’를 통한 사회세력화의 길을 통해 스스로의 권리를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쟁취해야만 했다. [일요서울]은 서울 노원구 하계동에 위치한 서울시지부 지부장실에서 박 부회장을 만나 1시간 남짓 인터뷰했다.
고엽제는 나무의 잎을 제거하기 위한 화학무기이자 농약의 일종이다. 고엽제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생명을 파괴한 공포의 대명사다. 고엽제 살포는 월남전에서 끝난 작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DMZ(비무장지대)의 시계확보를 위해서도 살포됐다. 그렇다보니 월남철군 40년이 지난 지금 이 시간에도 고엽제후유증은 날로 커져가는 현재진행형이다. 2012년 3월말 현재 국가보훈처에 신고된 고엽제 후유(의)증 피해자는 무려 13만8000여 명에 이른다.
고엽제는 대(代) 이어 고통 주는 재앙
놀라운 것은 고엽제 후유(의)증 2세로 국가보훈처에 신고된 환자는 89명이라고 한다. 고엽제가 대를 이어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이다. 자칫 할아버지에서부터 손자·손녀에까지도 유전될까 심히 우려된다. 전쟁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사람에게 무서운 재앙이 된다는 것을 고엽제가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고엽제는 ‘화해’의 메시지를 동시에 전하고 있다. 박 부회장에 따르면 한때 월남참전 한국군인과 맞서 총부리를 겨누었던 월맹군 9명이 2009년 4월 한국군 파월장병들이 영면한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을 찾아 참배했다. 이날 참배는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총회장 이형규)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고엽제협회(VAVA)는 우리나라보다 한참 늦은 2003년 결성됐으며 2004년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와 자매결연한 다음부터 매년 4월이면 열리는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창립기념 및 정기총회’에 대표단을 파견하고 있다. ‘과거의 적’이 ‘현재의 동반자’로 바뀌어 ‘적(敵)과의 화해’라는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베트남고엽제협회 관계자들이 올해도 4월 27일에 서울 용산구의 캐피탈호텔에서 개최되는 행사에 어김없이 참석할 예정이다. 그렇지만 정작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은 ‘고엽제 피해환자들에 대한 보상’에 나서고 있지 않다. 고엽제가 전해주는 ‘자연사랑, 생명사랑, 인간사랑’이란 내재 가치와 함께 ‘화해와 용서를 통한 평화와 번영’에 대해 참된 성찰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전우회는 ‘적(敵)과 화해’ 정부와 미국은 ‘모르쇠’
박 부회장은 “이제, 정부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법정단체로서의 위상을 높이는 한편 국민들의 지지와 호응을 받기 위한 활동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 부회장은 특히 “대미고엽제 배상문제는 13만 고엽제 회원들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라며 “미국에 4차례나 가서 백악관과 유엔본부 앞에서 입장전달 활동을 했지만, 법원의 일부 승소판결 이외에는 진전된 것이 없다”고 탄식했다. 이어 그는 “우리 전우들 나이가 어느덧 70세를 넘어가고 있다”며 “올해에는 특히 대미배상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높여야 하는 상황”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박 부회장은 또 “4·11총선이 끝났다”며 “19대 국회에서는 ‘고엽제 2세 환자’들의 문제로서 숙원사업인 ‘유족승계’를 꼭 이뤄내겠다는 각오”라고 말했다. “회장단이 결의하고 합심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는 자신감도 내비쳤다. 그는 조직에 대한 충성과 믿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유족승계, 19대 국회서 꼭 이룰 것” 다짐
박 부회장에 따르면 고엽제전우회가 오늘날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형규 총회장의 희생적인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91년 고엽제가 국내로 처음 알려진 뒤로 이 총회장은 당시 회원들의 끼니를 잇지 못하는 상황을 보고 회원들을 위해 자신의 재물을 내놓는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며 “그 결과 3평 남짓한 쪽방 사무실을 벗어나 사단법인으로 이제는 법정단체로 발전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특히 그는 고엽제전우회의 응집력이 다른 제대군인 단체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한 것은 같은 피해자 입장이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감싸주는 ‘양보와 희생’이라고 강조했다. “내가 다소 희생이 되더라도 감내하겠다”는 정신이 오늘날의 거대조직으로 발전하는데 밑거름이 됐다는 설명이다.
박 부회장은 “처음 월남 간다고 할 때는 제발 살아만 돌아와 달라고 했다. 유명을 달리한 5000여 전우들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 왔다. 하지만 정부는 우리들을 냉대했다”면서 “가족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하는 전우들, 특히 부부의 인연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하고 헤어지는 가족 간 생이별을 하는 전우들을 볼 때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말했다. 박 부회장에 따르면 고엽제전우회가 본부와 16개 시도지부와 지부별로 고엽제전우들의 미망인과 불우이웃에게 매월 복지차원에서 일정액을 지원하고 있다. 서울시지부의 경우 70여 명에게 매월 지원금을 보내고 있다.
박 부회장은 충남 천안출신으로 1967년 10월 월남어 교육대에서 초등반과 고등반을 수료하고 정보계통에서 대민요원으로 1년 정도 활동하다 차출병으로 맹호사단 1연대 소속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다. 월남 군(郡) 소재지에서 한국군 9명이 미군들과 함께 정보활동을 했는데 ‘월남지방군 883부대’가 작전 중 문서를 노획했다. 그 문서는 암살자 명단이었는데, 그 명단에 박 부회장의 이름이 올라 있어 한국군에서 더 이상 그를 월남에 둘 수 없게 됐다. 그는 일병으로 월남에 가서 병장으로 한국에 돌아와 제대를 했지만 1년 4개월 정도 군 생활을 더 했다. 더욱이 3살 때 아버지를 여의였는데, 월남전 중엔 어머니(향년 62세)마저 잃고 말았다. 제대 후 한국일보사에 근무할 때 경기도 양주에 사는 아내(심재옥·63세)를 만나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고엽제환자 판정은 1996년 중추신경장애로 받았다. 1998년 서울북부지부장이 된 후 2008년 서울시지부장을 거쳐 2009년 4월부터는 고엽제전우회 부회장과 서울시지부장을 겸하고 있다. 서울시지부 사무실은 오는 8월경 서울 내곡동 헌인마을 내의 대지 340평에 건평 50평의 새사무실을 마련해 이전할 계획이다.
<대담·정리=서원호 취재국장> 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