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 ‘민간인 불법 사찰’ 반격팀 꾸렸다
“노무현 정권 때도” 물타기 전략
[일요서울 ㅣ 조기성 기자]이명박 정권의 ‘민간인 불법 사찰’ 파문이 날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이 사건은 지난달 30일 새벽 KBS 새노조의 문건 폭로로 새 국면을 맞이했고, 청와대가 노무현 정권에서도 이뤄진 불법사찰이라고 즉각 반박에 나서는 등 공세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진실공방 양상까지 치닫고 있다.
청와대는 민주통합당 등 야권이 새로운 사실을 터트릴 때마다 반격할 카드를 하나씩 꺼내들겠다는 방침을 정하고 ‘반격팀’을 꾸렸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하지만,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과 최종석 전 행정관이 민간인 사찰과 은폐 혐의로 지난 3일 구속되고,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의 ‘관봉’ 띠지 돈뭉치 사진 폭로 등이 이어지면서 여권에 악재로 작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까지는 ‘헛발질’ 수준이었던 청와대의 본격적인 반격이 향후 정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귀추가 주목된다.
사찰문건 폭로 이후 민주당 측이 이명박 대통령의 하야 문제까지 거론하는 등 공세를 한층 강화하고, 여당인 새누리당조차 “정부가 불법사찰로 국민을 감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만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질 사람은 책임져야 한다”며 권재진 법무장관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게다가 새누리당 내부에서는 이 대통령에 대한 탈당요구가 다시 불거지고 청와대와 선을 확실히 그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청와대측으로서는 갈수록 수세에 몰리게 된 형국이었던 셈이다.
이전까지는 “검찰수사를 지켜보겠다”는 입장만을 되풀이 하던 청와대가 전면 역공에 나서고 있는 이유다. 이처럼 청와대가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 것은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 이명박 대통령과의 ‘밀월 관계’를 택한 만큼 총선 정국에서 최대한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는 점에 더해 총선 이후 여소야대 국면에서 수세에 몰릴 경우 임기 말까지 부담을 안고 갈 수밖에 없다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일요서울]과 통화에서 “청와대 안팎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에 대한 대응팀이 꾸려진 것으로 안다”면서 “하금열 현 대통령실장은 허수아비에 불과하고 임태희 전 실장이 여전히 모든 것을 컨트롤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야당의 공격에 대해 조직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靑, ‘전 정권 공동책임론’ 카드 꺼내들어
실제 청와대는 최금락 홍보수석과 박정하 대변인을 통해 사안별로 즉각적인 반박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있다. 청와대는 지난달 31일 사찰문건과 관련된 입장을 발표, 문건에 포함된 2619건 중 80%가 노무현 정부 때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한 데 이어 구체적인 민간인ㆍ정치인 사찰사례를 제시하며 당시 총리나 청와대 민정수석 등을 지냈던 민주통합당의 한명숙 대표와 문재인 상임고문의 연루 가능성까지 제기했다.
박근혜 위원장도 청와대의 ‘물타기’ 전략에 힘을 보탰다. 박 위원장은 “이번에 공개된 문건의 80%가 지난 정권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면 어느 정권할 것 없이 불법 사찰을 했다는 것이 밝혀진 셈”이라며 “국민을 보호하고 국민에게 힘이 돼야 할 정부가 오히려 국민을 감시하고 사찰했는데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기가 막힐 일이다. 저에 대해서도 지난 정권과 이 정권 할 것 없이 모두 사찰했다는 언론보도가 여러 번 있었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민간인 불법사찰에 대해 사과 대신 ‘불법사찰 참여정부 공동책임론’을 제기한 데는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위기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잘못을 인정하게 될 경우 국기문란 사건으로 비화되면서 대국민 사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권퇴진 요구까지 거세질 것이라는 판단이 강경 대응으로 선회하게 된 배경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여야간 정치공방으로 이어진다면 보수층 결집 효과까지 가져올 수 있다는 판단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정희 한국외국어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청와대가 역공을 펼치는 것은 총선 때문”이라면서 “지금 잘못을 인정하거나 묵묵부답으로 수세적으로 가는 것보다는 전 정권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며 이전투구 양상으로 몰고 가는 것이 선거에서 타격이 적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박선숙 민주통합당 사무총장이 “민간인 사찰 문제로 오히려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층이 급속히 결집하고 있어 걱정”이라고 우려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선공은 자제, 역공은 즉각
청와대는 야당측 공세가 있을 경우 맞대응해 나가겠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선공을 통한 전면전에 나설 경우 떠안게 될 부담이 적잖을 것이란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사찰정국 자체가 청와대 측에 불리할 수 있는 사안인데다 야당과의 전면전을 통해 판을 더욱 키울 경우 선거를 정권심판론으로 몰아가겠다는 야권 전략에 말려들게 되고 결국 여당인 새누리당의 총선 판세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야당 측이 추가 폭로를 할 경우 사실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적극 반박해나가는 쪽으로 스탠스를 잡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민주통합당이 원충연 전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조사관의 수첩을 공개하면서 민간인 사찰에 청와대, 기무사, 국정원 등이 개입됐다고 주장하자마자 청와대는 즉각 반박에 나섰다.
박정하 청와대 대변인은 민주당이 사찰 자료를 공개한 직후 가진 브리핑을 통해 “민주당이 또다시 일방적인 주장을 했는데, 이는 ‘민주당식 수첩의 재구성’에 불과하다. 진실 규명에 대한 의지는 전혀 없는, 일방적인 정치공세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청와대 측은 야당의 폭로가 이어질 때마다 대응책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헛발질’ 속속 드러나
하지만, 청와대의 역공이 ‘헛발질’ 수준이었음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김영환(안산 상록을) 민주통합당 의원은 자신이 참여정부 시절 불법 사찰을 당했다는 청와대 측 주장에 대해 지난 4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청와대와 일부 언론이 합작해 한 사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희생양으로 만드는 일을 있어서는 안 된다”며 “터무니 없다”고 일축했다.
또한, 총리실 민간인 사찰문건의 대부분이 참여정부에서 작성된 사찰문건이라는 청와대의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청은 지난 4일 “김기현 경정이 검찰이 압수한 USB 2개에 대해 ‘2005년부터 경찰청 감찰담당관실에서 썼던 것이 맞지만 당시 저장된 자료는 경찰의 비위사실에 대한 감찰보고서’라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이어 “경찰의 복무점검과 기강단속은 감찰담당관실의 고유업무이지 사찰이 아니다”고 말했다.
경찰청의 이 같은 발표는 청와대의 ‘불법사찰 참여정부 공동책임론’의 근거자료로 제시한 2,200여건 문건이 불법사찰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더해 참여정부 시절 국정원장을 지냈던 고영구 전 국정원장과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최근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 구술기록 등을 통해 참여정부에서는 국정원 등 정보기관의 사찰 정보수집, 정치보고를 아예 하지 못하게 했다고 밝혔다.
고 전 국정원장은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적인 간섭이나 지시를 받은 적이 없고, 더구나 정치사찰은 엄격히 금지했다”며 “인수위 시절부터 대통령께서 국정원장의 독대를 받지 않겠다, 또 사찰성 정보 같은 것을 수집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겠다는 등등의 국정원 개혁에 관한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고 말했다.
김 전 국정원장도 “참여정부 자체가 정치정보를 하지 못하게 했다. 정보관리실로 정치정보가 올라오지도 않았고, 정치정보를 취급한다는 것으로 문제되거나 거론된 사실이 없다”며 “무엇보다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당선 이후 지속적으로 국가정보원·검찰·경찰·국세청, 이른바 ‘권력기관’을 더 이상 정치권력의 도구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거듭 밝혔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2009년 국가정보원의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을 제기했다가 국정원으로부터 소송을 당한 박원순 서울시장에 대해 대법원이 6일 최종 승소 확정 판결을 한 것도 악재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박 시장은 청와대의 민간인 불법사찰에 대해 ‘명백한 헌법 위반’이라며 이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를 요구했다. 박 시장은 “반성하지 않고 강경 대응함으로써 오히려 문제를 키우고 있고 지금은 정말 대통령이 사과해야 할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민간인 불법 사찰’에 대한 청와대의 ‘물타기’ 전략이 결국 흐지부지되면서 총선 이후 대선 정국이 ‘MB정권 심판론’으로 뒤덮일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새누리, MB와 선긋기 본격화 ‘예고’
청와대로써 ‘민간인 불법 사찰’ 파문은 총선 이후 더욱 험로가 예상된다. 야권이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근혜 정권’ 이미지를 강화하려 할 것이며 박 위원장은 이러한 공세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 ‘차별화’에 나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이 대통령의 ‘사과’, ‘탈당’ 보다 높은 수위의 ‘확실한 선긋기’로 이어질 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상돈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이 지난 5일 MB하야 발언을 한 것도 총선 이후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 비대위원은 불법사찰 파문과 관련, ‘대통령이 이 문제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면 하야까지 요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런 해석이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이 비대위원은 “만일 그렇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탄핵당한 사유는 오히려 경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며 “이것은 법치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훼손이기 때문에, 과연 우리 국민들이 사과 정도로 그냥 만족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있다”고 하야 차원의 행동을 재차 거론했다.
이준석 비대위원도 “노무현 정부 때도 이런 일(사찰)이 있었다고 몰아가기 전에 이명박 정부에서 문제가 있었다면 사과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청와대 한 관계자가 “이번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를 얻게 된다면 청와대와의 차별화를 더욱 강화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 데서도 청와대의 속사정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총선결과에 따라 레임덕(대통령 임기말 권력누수)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청와대측은 때문에 사찰정국의 파장을 가능한 한 줄여나가는 쪽에 무게를 둔 것으로 보인다.
이 관계자는 총선 후 정국과 관련된 청와대 대책에 대해 “현재 상황으로는 총선결과를 속단하기 쉽지 않은 상황인데 이후 대책을 논의할 단계는 아니다”고 말을 아끼면서도 “민간인 사찰과 관련된 야당 측 정치공세에 대해선 사안별로 적극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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