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탄만 쏘고 멈춘 재벌개혁, 이대로 끝나나

[MB발언 재계앓이②] 빵집철수 했으니 대기업 때리기 ‘그만’

2012-02-07     강길홍 기자

이명박 대통령의 한마디에 재벌 2·3세의 ‘빵집철수’가 잇따랐다. 재벌이 서민과 공생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는 시각도 있지만 취미생활을 중단했을 뿐이라는 비판도 여전하다. 삼성(회장 이건희)·롯데(회장 신격호) 등에서 서둘러 철수를 결정한 베이커리 사업이 서민 자영업자와의 경쟁과는 거리가 멀었고, 이마트 등에 입점한 신세계(대표이사 부회장 정용진)는 베이커리 사업을 철회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빵집철수 논란 중에도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카페는 수십년 전통의 제과점을 밀어냈고, 대형마트는 변종 SSM이라는 의혹을 사고 있는 편의점으로 골목상권에 침투하고 있다. 모기업의 유통망을 이용한 재벌 2·3세의 사업확장도 여전하다. 대기업을 규제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MB, “지나친 기업 위축 국민에 도움 안돼”
재벌 2·3세, 모회사 이용한 사업확장 여전

지난달 31일을 끝으로 홍익대 앞에서 1986년 개점 이후 30여년간 영업해오던 ‘리치몬드 과자점 홍대점’이문을 닫았다. 리치몬드 홍대점의 폐점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날은 평소보다 많은 손님들이 몰려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리치몬드 홍대점은 임대료를 올려 입점하려는 대기업 계열의 프랜차이즈의 공세에 밀려 끝내 자리를 내줘야 했다. 빈자리는 롯데그룹 계열의 프랜차이즈 카페 ‘엔제리너스’가 채운다.

대형 유통업체들의 편의점·SSM 등을 내세운 골목상권 장악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그나마 중소마트들은 SSM(기업형 수퍼마켓) 규제정책 덕에 영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대형 유통업체들은 ‘변칙·꼼수'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사업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홈플러스의 편의점 ‘365플러스'와 롯데쇼핑의 균일가숍 ‘롯데마켓999'는 규모만 줄인 SSM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결국 재벌 2·3세의 빵집철수가 대기업의 골목상권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고, 서민 자영업자와 상생하겠다는 의지와도 관련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금까지 사업을 철수한 대기업 계열의 빵집이 입점한 위치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가장 먼저 빵집철수를 선언했던 호텔신라(사장 이부진)의 자회사 보나비가 운영 중인 커피·베이커리 카페 ‘아티제’는 호텔신라를 중심으로 운영했던 곳이다.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외손녀 장선윤 블리스 대표가 철회의사를 밝힌 베이커리 전문점 ‘포숑’은 롯데백화점을 중심으로 입점해 있었고, 현대차그룹 계열의 ‘오젠’은 ‘구내매점’에 불과했다.

반면 118개 이마트 등에 입점해 서민을 상대로 빵장사를 하고 있는 조선호텔 베이커리는 사업 철수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있다.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이 지분 40%를 가지고 있는 조선호텔 베이커리는 ‘데이앤데이’·‘달로와요’ 등을 운영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최근 10년 사이 영세 서비스 사업자들이 폐업하거나 전업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에서 개인 빵집을 운영하는 김모씨(51)는 “호텔에서 운영하는 빵집을 동네사람들이 가서 이용하는 것도 아닌데 사업을 접는다고 해서 골목상권에 무슨 도움이 되겠냐"며 “그냥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조치일 뿐 대기업 계열의 프랜차이즈 빵집이 지속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아무런 규제 없이 골목 상권을 장악하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중소마트를 운영하는 심모씨(34)는 “대기업 편의점·마트가 전통적인 서민 자영업자의 영역을 잠식해 나가면서 개인이 혼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며 “체인점 사업에 참여하거나 업종 전환도 고려하고 있지만 초기 투자비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릴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기업분할·계열분리 명령제 등 주장도

때문에 재벌 2·3세의 잇따른 빵집철수 선언이 이 대통령의 비판에 대한 일종의 시늉에 불과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빵집 철수 외에 부당한 경영권 승계 수단으로 지목됐던 일감 몰아주기 등을 시정하겠다는 재벌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모기업의 유통망을 이용한 재벌 3세의 사업확장 소식만 들려온다.

지난 3일 롯데백화점 명동본점 명품관 에비뉴엘에서는 영국 브랜드 래들리(Radley)의 론칭 행사가 열렸다. 매스티지(Masstige·대중명품) 브랜드인 래들리가 명품관에 입점하게 된 것은 래들리를 수입하는 비엔에프통상을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외손자인 장재영씨가 운영하기 때문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래들리는 롯데백화점에 입점하기 전 롯데닷컴을 통해 대대적인 홍보를 벌이면서 롯데카드 결제시 10%의 포인트 적립 행사를 열었으며 곧 롯데면세점 입점도 앞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부원장은 ‘재벌 3세 분할 승계와 경제력 집중 강화’ 보고서를 통해 “국민들이 재벌가 자녀들의 빵집, 외식사업, 외국 명품 브랜드 수입 사업 등에 분노하는 것은 그들의 취미생활로 서민의 생계가 위협받기 때문만은 아니다"라며 “3세 자녀들로 재벌그룹의 소유와 경영 승계가 진행되면서 대다수 일반 청년들의 어려움과 다르게 이들은 무임승차에 가까운 세습과정을 밟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 부원장은 또 “이제는 자영업자나 중소기업, 소비자를 보호의 울타리에 가두려 하지 말고 재벌을 규제의 울타리 속에 넣어야 한다"며 “기업분할 명령제와 계열분리 명령제를 통해 이를 국민경제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엄격하고 적법한 절차에 의해 진행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재벌개혁에 대한 여론이 높아지자 벌써부터 ‘재벌 때리기'를 그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국무회의에서 “기업을 너무 위축시키면 기업이 투자와 고용을 줄일 수 있어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 재벌세 도입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이 대통령의 발언 직후 관련 부처 장관들도 기업 편들기에 나서고 있어 서민들의 한숨은 더욱 깊어질 전망이다.

<강길홍 기자> sliz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