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북한 정보 먹통…국가 안보 위기‘논란’
“북한 노동당대표자회 연기이유 권력승계 목적 아니다”
2010-09-28 윤지환 기자
북한 노동당대표자회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분석이 난무하고 있는 가운데 실질적인 권력자가 누구인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이 체제유지를 위해 외형상으로 권력승계 구도를 가져가면서 내부적으로는 군부와 노동당을 아우르는 정치적 실무자를 따로 둘 것이라고 보고 있다. 말하자면 황제(정신적 지도자)와 총리로 구성된 일본식 신 왕정국가 형태를 구성할 것이라는 얘기다.
전 세계가 북한 권력구도 변화를 예의주시함에 따라 북한 관련 핵심정보를 수집하는 국가정보원에도 범국민적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원세훈 국정원장은 최근 이러한 북한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일부에서는 개각 때 단행하지 않은 국정원장 교체를 추진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북 조선중앙방송은 “조선노동당 대표자회 대표자 선거를 위한 대표자회들이 진행됐다”며 “당 최고 지도기관 선거를 위한 당 대표자회는 주체99(2010)년 9월 28일 혁명의 수도 평양에서 열리게 된다”고 이달 21일 보도했다.
그러나 이 방송은 연기 이유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당 대표자회 일정이 연기되자 그 배경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쏟아졌다. 이 중 김 위원장의 건강악화설과 당 요직 선거를 둘러싼 엘리트 권력 암투 그리고 후계자 김정은의 공식 등장에 대한 논의 등이 일정연기의 주요 이유로 꼽히고 있다.
이 중 건강악화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8월 말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자강도 별장에서 쉬면서 건강관리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의 건강상태는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된 바 없으나 최근 건강이 악화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대북 라디오 열린북한방송은 고위급 소식통을 인용, “김 위원장이 방중 후 9월 8일 새벽 호흡곤란을 일으켜 긴급처치를 받았다”며 “뇌졸중 예방약 부작용으로 보이며 의료진은 앞으로 3개월이 고비라면서 최소 보름간 휴식과 과도한 업무를 중단하라는 처방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북한의 권력 누구에게
김 위원장의 건강상태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 조짐을 보이자 북한도 권력재편성을 서두르고 있는 분위기다. 세계도 북한의 권력승계 여부에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영국 언론매체들은 이 달 22일(현지시간) 당대표자회와 관련, 3대를 이은 독재국가 탄생 가능성을 일제히 타진했다.
일간지 가디언은 이날 김 위원장이 이번 대표자회를 통해 김정은에게 중요한 민간 직위와 군사 직위를 부여할 것이고 늦어도 그를 2012년까지 후계자로 세울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을 전했다.
또 가디언은 “이미 김정일 여동생 김경희가 조카를 누르려 한다는 추측도 나돌고 있다”고 전해 주목을 끌었다.
일간지 텔래그래프는 이날 기사에서 “다음 주 회의에서 김정은을 차기 지도자로 낙점하는 것 외에 어떠한 논의도 없을 것”이라며 ‘정해진 결론’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김정은이 북한의 권력을 세습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북한 대변인을 자처해 온 스페인의 알레한드로카오 데 베노스(36)는 같은 달 23일 한 외신과의 회견에서 “노동당 대표자회를 통해 김정은으로의 권력세습 길이 열릴 것이라는 보도를 믿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의 이런 견해는 국내와 중국의 일부 대북 전문가를 비롯해 대북 소식통들의 시각과도 일치한다. 또 그는 “김 위원장의 경우 부친인 김일성과 함께 몇 년간 일해 권력승계 당시 북한 주민들에게 알려진 상황이었지만 정부 부서에서 일한 경력이 없는 김정은은 그렇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북한 대외문화연락위원회의 특사 직함과 북한 여권을 갖고 있는 데노스는 “모두가 김정은에 대해 얘기하지만 평양에서는 누구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다”며 “나는 김정은에 관해 읽은 것도 없고 사진 한 장 보지 못했으며, 정부 부서에서 근무하는 내 동료들도 김정은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강조했다.
김정은-김경희 ‘대립설’
당대표회가 연기되자 그 내막을 놓고 북한에 권력투쟁이 일고 있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전 일본 방위상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누이동생인 김경희가 후계자 경쟁에 가세했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가디언지도 이 같은 내용을 보도했지만 사실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일본 국가안보보좌관이기도 한 고이케 전 방위상은 홍콩의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지 이 달 16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김경희는 김 위원장과 피를 나눈 유일한 형제로 신뢰 관계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북한에서 김 위원장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혈족”이라고 강조하면서 김경희의 권력승계 가능성을 피력했다.
고이케 전 방위상은 “김정은은 젊은데다 경험이 풍부하지 않다”면서 “김 위원장의 누이동생이자 북한의 2인자인 장성택의 부인이기도 한 김경희가 김정은의 권력 세습을 방해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또 “김경희는 노동당 내의 다양한 요직들을 경험했으며 막강한 권한을 가진 중앙위원회 멤버이기도 하다”며 “지난 6월 김정은을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자로 전폭 지지했던 노동당 고위 관료 리제강이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때 김경희가 사고를 위장해 리제강을 제거한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던 것도 권력에 대한 김경희의 야망을 뒷받침해준다”고 고이케 전 방위상은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 전문가들은 김경희의 권력승계설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이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비서는 “김경희는 아마 권력을 승계하기 힘들 것”이라며 “김경희는 알콜중독으로 건강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일상생활도 쉽지 않을 정도로 건강이 나빠 김경희는 모든 업무에서 물러난 상태”라고 말했다.
황 전 비서는 또 “지금은 김정은이든 김경희든 누가 권력을 승계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며 “북한은 김정일 사후에 대한 대비를 모두 세워놓았기 때문에 체제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북한 문제를 어떤 식으로 끌고 나가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북한 소식에 정통한 한 인사는 “북한은 아직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남성보다 높지 않은 보수적 사고를 유지하고 있다”며 “또 지도층은 유약한 여성이 권력을 쥐게 되면 체제가 큰 위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김경희가 권력을 쥐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섭정체제 가장 유력
이와 함께 김 위원장의 매제인 장성택이 섭정을 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김 위원장은 이 달 8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2기 3차 회의를 통해 장성택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발탁하고 새 내각 총리에 최영림을 임명했다.
이를 두고 중문 신문인 명보(明報)는 ‘김정일 매제 북한의 섭정왕이 되다(金正日妹夫成朝鮮攝政王)’라는 제목의 국제면 머리기사를 통해 주요 권력 포스트를 교체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결과를 상세히 보도했다.
문회보(文匯報)도 ‘북한 총리교체, 김정일 매제 승진(朝鮮撤換總理 金正日妹夫升職)’이라는 제목의 국제면 톱기사에서 “장성택이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됨으로써 사실상 북한의 ‘제 2인자’가 됐다”면서 이는 김정일이 3남인 김정은에게 권력을 승계하려는 후계구도와 관련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섭정세력이 들어서게 될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다.
리처드 부시 브루킹스연구소 동북아정책연구실장은 최근 펴낸 ‘핵을 지닌 북한의 도전, 어두운 그림자 속의 한줄기 희망’이라는 보고서에서 “한국과 미국 등 나머지 6자회담 당사국들은 적절한 시점에 섭정세력과 일종의 ‘그랜드 바겐(일괄타결)’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부시 실장은 “북한의 후계구도와 관련해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권력형태가 달라질 것이라는 점”이라며 “한국전쟁 이후 일관되게 유지돼 왔던 일인독재는 계속되지 않고 섭정이 들어설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보인다”고 예상했다.
국정원 대북 안보 구멍
한편 북한의 정세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임과 동시에 국정원의 대북 정보라인 부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원 원장은 이 달 13일 국회 정보위 전체회의에 출석한 자리에서 북한 노동당대표자회 개최와 관련한 발언을 했다.
원 원장은 이날 대표자회에 대해 “후계자 노출이 주요한 관건”이라며 “북한에서 9월 상순이라고 했으니 이번 주에 열리지 않을까 예측한다”고 말했다. 또 원 국정원장은 당 대표자회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문제로 열리지 않는다는 보도에 대해 “건강 문제 때문에 안 열리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원 원장의 이 같은 발언은 모두 빗나가거나 전문가들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어서 원 원장의 업무수행력 부재에 대한 시비가 불거질 조짐이다.
김 위원장의 건강문제에 대해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난달 중국 방문 당시부터 5분 정도씩 깜빡 잠들었다가 깨는 현상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반복되는 건강 이상증세를 보였으며 북한이 ‘9월 상순’ 개최를 예고했던 제3차 노동당 대표자회를 연기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이 달 21일 보도했다.
방송은 ‘평안북도의 당 고위간부 소식통’을 인용, “초기에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치료하면 건강상태가 좋아져 대표자회에 참석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고 그래서 회의 일정도 변경시키지 않았다”며 “하지만 노동당 대표자들이 모두 평양에 집결한 이후에도 호전될 것처럼 보이던 김 위원장의 이상증상이 지속됐고 회의장에서 졸거나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일 수 없기 때문에 회의를 연기한 것”이라고 전했다.
김 위원장의 건강상태가 악화돼 북한이 연기된 대표자회를 조금 앞당길 정도로 서두르고 있다는 소식도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원 원장은 건강문제를 배제했다. 국정원의 대북정보력을 의심케 하는 것은 이뿐 아니다. 대표자회는 9월 상순에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이미 9월 초부터 연기될 것이라는 전망이 대북소식통들 사이에서 나돌았다. 그러나 원 원장은 “9월 상순에 개최될 것”이라 말했다. 이는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국정원이 대북소식통보다 정보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대목이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정치적 업무에 바빠 본연의 업무에 소홀한 것 아니냐”고 비꼬기도 한다.
원 원장은 상당수 내부 직원들 뿐 아니라 퇴직한 전직 국정원 직원들 사이에서 “정보업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지난 개각에서 교체되지 않았다. 정치권에서는 “현 정부가 이상한 정도로 원 원장을 감싸고 있다. 국정원 내외부적으로 원장의 교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렸는데 이번 개각에서 국정원장이 교체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라며 의문을 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전직 국정원 고위간부였던 한 인사는 “원 원장의 체제로 들어서면서 국가 안보에 큰 구멍이 생겼지만 정부에서 이 문제를 쉬쉬하고 있다”며 “국민들 사이에서도 국정원의 역할이 무엇인지 잊혀진지 오래인 것 같다”고 대북 정보력 부재를 우려했다.
[윤지환 기자] jjh@dailypo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