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서 적으로 만난 ‘농구대잔치’ 명콤비 허재·강동희

프로농구 챔피언을 향한 전설들의 불꽃 튀는 장외 대결

2011-04-26     이창환 기자

[이창환기자] = 선수시절의 명콤비가 챔피언 결정전에서 만났다. 전주KCC의 허재 감독과 원주동부의 강동희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명선수는 ‘감독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속설을 깨고 2010-2011 프로농구 경쟁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았다. 현재 3차전까지 진행된 챔피언 결정전은 2승 1패로 원주 동부가 앞서있다. 국내 최고의 센터를 가리는 김주성과 하승진의 대결만큼 관심을 끌고 있는 허재와 강동희의 대결. 챔피언 결정전을 지켜보는 농구팬들은 경기 외적인 흥미까지 누리고 있는 셈이다.

4월 16일부터 시작된 챔피언 결정전의 1차전 승자는 원주동부였다. 원주동부는 상대적 열세라는 전문가들의 평가를 깨고 원정 경기 속에서 77:71 승리를 기록했다.

이날 강 감독은 “상대보다 한 발 더 뛰며 공격 리바운드를 저지한 한 것이 열쇠였다”며 첫 번째 승리를 자축했다. 반면 허 감독은 “어제 연습할 때부터 선수들의 정신력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라며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1차전은 원주 동부의 기습 외곽포가 다른 경기 때보다 많이 적중했다. 3점 슈터가 아닌 김주성과 안재욱이 외곽포로 18점이이나 따낸 것이다. 전주KCC는 지역방어를 통해 저지했어야 했지만 선수들의 수비 움직임이 둔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연이은 2차전에서는 허 감독의 독설이 통했는지 전주KCC가 원주동부를 87:67, 20점차로 대승했다. 허 감독 역시 집중력이 살아난 선수들을 칭찬했다. 이날 경기서 전주KCC는 슛과 리바운드, 어시스트까지 공수에 걸쳐 원주동부를 압도했다.


농구 대통령도 눈치 못 챈 강동희 매직

2차전에 대해 강 감독은 “우리의 아킬레스건이 그대로 드러난 경기였다”며 패배를 인정했다. 높이에서 밀리기 때문에 외곽을 공략하는 것이 전략인데 그것마저 봉쇄당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 감독은 “큰 점수차로 패했다고 해서, 총체적으로 우리 팀에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며 “홈에서 반격하면 된다”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3차전 승리를 예감한 듯한 강 감독의 발언처럼 3차전은 원주동부가 전날 당한 패배를 깨끗이 설욕했다.

이날 원주 동부는 시종일관 질식 수비를 펼쳐 최강 화력을 자랑하는 전주KCC를 2쿼터 까지 20점으로 잠재웠고 원주동부는 62:54로 승리했다.

강 감독은 “워낙 2차전에서 농락당했기 정신적인 면을 강조했다”며 “공격에 성공하지 못했을 때는 상대방도 성공 못하게 압박하라는 주문을 했다”고 말했다. 슛 성공률이 저조한 것은 원주동부도 마찬가지 였는데 선수들이 수비에 열심이었던 점이 승리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이날 경기에 대해 허 감독은 “할 말이 없다. 한 것이 있어야 말을 하지”라고 운을 뗀 뒤 “팀 자체에 문제가 있다. 속공도 없이 가만히 서있는 것이 꼭 1차전을 생각나게 했다”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3차전까지 진행된 챔피언 결정전. 강 감독의 원주 동부는 남은 4경기에서 2승만 추가하면 챔피언에 오를 수 있는 고지를 점령했다.


27년 지기 선후배, 외나무다리서 만나

허 감독과 강 감독은 선수 시절 각각 ‘농구대통령’, ‘코트의 마법사’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두 감독의 말 한마디, 일거수일투족이 여전히 농구 팬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가 과거 명성 때문인 것이다.

고교시절 때부터 평판이 자자했던 두 감독은 중앙대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선수생활을 함께 시작했다. 허 감독과 강 감독의 가세로 당시 중앙대학교는 1986 ~1987년 농구대잔치 우승후보로 급부상 했다.

그 예상이 딱 들어맞은 듯 두 감독은 중앙대학교와 기아자동차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경기에서는 명콤비, 평소에는 친한 형 동생으로 자리매김 했다.

특히 허 감독과 강 감독이 활약한 기아자동차는 농구대잔치를 7회 우승했는데 이는 연세대학교를 능가하는 최다 횟수다.

여기에 국가대표로 함께 뛴 기간까지 포함하면 KBL프로농구의 탄생과 한국농구의 발전의 주역으로 봐도 손색이 없다.

사실 강 감독은 선수시절 허 감독의 가려 2인자 이미지도 적잖이 있었다. 허 감독이 화려한 플레이와 해결사 본능으로 승부의 중심에 서있던 반면, 강 감독은 포인트가드로서 게임 조율과 어시스트에 주력했던 것이다.

강 감독의 포지션이 포인트가드에 국한됐던 반면 허 감독은 본래 포지션인 슈팅가드 뿐 아니라 파워포워드, 센터포워드 등도 소화했던 만능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농구 팬들이 보고 있는 ‘강동희 2인자 론’에 허 감독은 동의하지 않았다.

허 감독은 “내가 인정하는 최고의 선수는 언제나 강동희”라고 밝힐 정도로 강 감독의 농구 실력을 극찬했다. 강 감독의 뒷받침과 경기운영의 안정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수많은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는 것이다.

허 감독의 말처럼 1997년 강 감독은 허 감독을 경기 외적으로도 뒷받침하기도 했다. 허 감독이 음주운전 파문과 최인선 감독과의 갈등으로 팀 내 입지가 줄어들었을 때 팀 내 맏형으로서 대신 팀을 이끈 것이다. 1997년 강 감독은 리그 도움과 가로채기 2관왕을 수상하는 등 허 감독의 몫까지 뛰어 팀내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다.

강 감독의 지원에 스스로 마음을 다잡은 허 감독은 이후 1998년 화려하게 부활하며 농구 대통령의 면모를 과시했다.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아는 허 감독과 강 감독. 둘의 한 치 양보 없는 승부로 올해 챔피언 결정전은 농구대잔치를 즐겼던 기성세대들까지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hojj@dailypo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