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마와 조교사의 아름다운 동행
일요서울과 KRA(한국마사회)가 함께 하는 경마 길라잡이
2011-03-21 기자
서울경마공원의 최고령마 ‘밸리브리(9세, 거세마)’가 지난 13일 제 10경주(1800M)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작년 4월에 마지막 우승을 한 이후, 1년 만에 맛보는 기쁨이다. ‘밸리브리’는 사람으로 치면, 환갑을 훨씬 넘긴 나이로 ‘머신건’과 함께 서울경마공원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최고령 마다. 팽팽하던 근육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쳐졌고, 입 주변의 주름도 해가 바뀌자 더 많아졌다. 한 때는 경주로를 압도하는 폭발적인 스피드와 뒷심을 자랑했지만, 이제는 젊은 경주마와 몸싸움도 힘들어 해 전성기가 지난 퇴물 취급을 받아왔다. 이런 ‘밸리브리’가 홍대유(48) 조교사를 만나면서 노장 투혼을 발휘하고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열심히 새벽 경주로를 밝히고 있는 ‘밸리브리’와 홍 조교사의 동행. 그 아름다운 현장을 따라가본다.
지난 1년간 ‘밸리브리’의 성적은 초라했다. 전성기의 명성은 퇴색했고, 7번의 경주에서 거의 꼴찌에 가까운 성적을 냈다. 그랑프리 대상경주 우승도 차지하며 한국 최고의 경주마라는 찬사를 받았던 영광은 돌이킬 수 없는 듯 했다.
그러나 세간의 무관심에 반항이라도 하듯, ‘밸리브리’는 총 12마리의 경주마가 출전한 이번 경주에서 가장 무거운 부담중량(56Kg)을 지고도, 당당하게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물론 과거처럼 압도적인 능력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노장의 투혼이 빚어낸 눈물겨운 승리였다.
‘밸리브리’는 현역 최고령 경주마에, 수득상금도 11억 원을 넘어 역대 경주마 중 4위를 기록 중이다. 누릴 수 있는 영광은 모두 누렸고, 이제 생애 마지막 우승을 차지했을 수도 있으니,‘밸리브리’를 명예롭게 은퇴시켜주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노마(老馬)는 당분간 경주로를 더 달릴 전망이다. ‘밸리브리’를 관리하고 있는 홍 조교사는 무엇이 ‘밸리브리’에게 가장 좋은 일인지 심사숙고해서 판단했다고 한다. 홍 조교사는 “밸리브리는 거세마라서 은퇴식도 열리지 않고, 또 은퇴를 해도 경주마의 본능이 워낙 강해서 승용마로 활용하기도 어렵다”며 “밸리브리는 경주마로서 달릴 때가 가장 행복할 것이다”고 밝혔다. 이어 “물론 앞으로 밸리브리가 또 우승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그저 건강한 모습으로 밸리브리를 좋아하는 팬들 앞에서 열심히 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덧붙였다.
사실 ‘밸리브리’는 홍 조교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교사 전업을 앞두고 있던 홍 조교사가 미국으로 연수를 갔다가 우연찮게 ‘밸리브리’를 발견했고, 당시 친분이 있던 김인호 마주에게 구매를 강력 요청했다. 2800만 원의 헐값에 국내로 들어온 ‘밸리브리’는 홍 조교사의 훈련 아래 명마로 거듭났다.
홍 조교사는 ‘밸리브리’의 데뷔전에 기승을 하며 첫 우승을 이끌어 냈고, 기수 은퇴 후에는 조교사로 ‘밸리브리’와 인연을 다시 맺었다. 그동안 ‘밸리브리’는 2007년 그랑프리 우승을 비롯해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승승장구를 했고, 홍 조교사 역시 신참 조교사의 매운 맛을 보여주며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밸리브리’가 나이를 먹으며 하향세를 보이자, 홍 조교사도 부진에 빠졌다. ‘밸리브리’의 전성기 때는 조교사 연간 다승 랭킹 5위권 안팎이었지만, 지금은 25위권으로 밀려났다. 그럼에도 홍 조교사는 조급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주마 관리를 학문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늦은 나이에도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해 미래를 준비 중이다. ‘밸리브리’ 역시 팔팔한 젊은 경주마와 함께 강도 높은 새벽훈련을 견뎌내며, 경주마로서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고 있다.
화려한 전성기는 어느덧 쏜살처럼 지나갔지만, 늙은 경주마와 중년의 조교사는 ‘느리지만 함께 동행하는 아름다운 경주’를 위해 오늘도 새벽 경주로를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