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수비농구로 재무장한다”
‘농구대표팀 새 사령탑’울산 모비스의 유재학 감독
2010-10-05 박주리 기자
한때 아시아 농구 코트를 평정했던 한국 남자농구대표팀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남자 대표팀은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서 5위에 그친 뒤 동메달조차 만져보지 못했다. 그 후 계속 국제대회에서 내리막길을 걷다 결국 2008년 베이징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지난해 톈진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사상 최악 7위의 성적을 냈다. 이런 농구대표팀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유재학 울산 모비스 감독이 2009~10시즌 우승팀 감독 자격으로 대표팀을 맡은 것. 슈퍼스타가 없는 모비스를 수비와 조직력을 앞세워 2번씩이나 우승팀을 만든 유 감독이야 말로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국민들에게 안겨줄 적임자로 평가되고 있다. 유재학 감독에 대해 알아본다.
유재학 감독은 선수시절에서부터 뛰어난 농구 실력으로 이미 인정을 받았다.
유 감독은 서울 상명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농구를 시작했다. 4학년 때부터 소년체전 3연패의 대주역으로 활약했다. 용산중학교 3학년 때는 39연승 대기록을 만들었다.
고등학생 때는 미비한 성적을 냈던 경복고를 이끌었다. 그는 모든 고등학생 농구대회 우승컵을 모교에 안겨줘 경복고는 ‘농구부 전성기’를 맞이했다.
경복고와 연세대 시절 최고의 포인트가드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입단한 실업 기아자동차에서도 정상급 포인트가드로 명성을 떨쳐 농구대잔치 무대에서는 ‘어시스트상’을 싹쓸이 했다. 하지만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더 이상 코트위에서 뛰지 못하고 28세의 젊은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35세, 역대 최연소 감독 데뷔
18년을 넘게 농구 코트에서 열심히 뛰었다. 만신창이가 된 무릎으로 선수생활을 포기했다. 때마침 모교 연세대에서 코치 제의가 들어왔다. 선수생활을 접으면 지도자가 될 계획이었으니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임했다.
유 감독은 연세대 코치로 4년을 일했다. 그는 “차라리 몸만 힘들면 되는 선수 시절이 그리웠다”라고 할 정도로 지도자의 길은 만만하지 않았다.
1997년 34살의 나이로 대우증권(현 전자랜드)의 초대 코치로 프로무대에 발을 들였다.
1998~99시즌에는 마침내 프로농구 최연소 감독으로 승격됐다. 그가 감독으로 취임하고 6년간 팀 대우증권은 신세기 빅스로, 그리고 전자랜드로 2번씩이나 팀명을 바뀌는 기구한 운명이었다. 모회사와 유니폼이 교체됐지만 유 감독만이 유일하게 변함없이 감독직을 유지했다.
2004년부터는 현역시절에 활약했던 기아의 후신, 울산 모비스로 옮겼다. 그리고 올해로 다시 여섯 시즌 째 지휘봉을 잡고 있다. 그는 프로감독으로서 단 한 번도 경질된 적이 없으며 한 팀을 맡으면 오래 감독직을 고수해 지도자로서 뛰어난 능력을 입증한다.
유 감독은 울산 모비스를 네 차례나 정규시즌 1위로 이끌었다. 2006~07시즌에는 10년 만에 챔피언 결정전트로피를 팀에 안겼다. 지난 시즌도 4강 플레이오프에서 탈락을 했지만 정규시즌에서는 우승트로피를 품었다. 그리고 2009~10시즌 챔피언 우승을 일궈냈다.
롱런의 비법은 뚝심과 성실함
유 감독이 10년을 넘게 감독 자리를 지키고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 기아자동차 선수 시절 유 감독의 스승이었던 최인선(현 SBS스포츠 해설위원)은 그의 성실함과 꾸준함을 들었다. 천재적인 감각보다는 꾸준히 노력하는 후천적면을 높이 샀다.
유감독은 선수를 뽑을 때도 성실함을 기준으로 뽑을 정도로 농구에 대한 열정이 깊다.
또한 프런트를 비롯해, 코칭스태프, 선수들에게 까지도 ‘선’을 잘 지키는 지도자로 평판이 자자하다. 그는 항상 일관적인 자세를 유지해 인간관계에서 선을 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 감독은 ‘뚝심’의 소유자다. 그는 자신이 한 결정을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번복하지 않는다.
용산중학교 시절, 모든 농구선수들이 용산고등학교로 자동적으로 올라가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선택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유 감독은 용산고를 지원하지 않았다. 대신 조건이 더 좋았던 경복고에 지원했다. 경복고에 가면 자신에게 더 이익이라고 판단해서였다. 용산중·고에서 난리가 났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신을 버리지 않았다.
대학 입학 시에도 같은 일이 발생했다. 고려대는 경복고를 지원했다. 그래서 경복고 출신은 고려대로 가야했다. 강제적이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하지만 유 감독은 연세대를 택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연세대 파란색 유니폼이 맘에 들어서”였다.
학교 측에서는 회유와 설득을 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꿈꿨던 유니폼이었다. 포기를 할 수 없었다. 학교 측은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확고한 신념이 있으면 절대 그것을 꺾지 못한다. 그가 지도자로 오래 롱런을 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뚝심으로 감독직을 임하기 때문이다.
조련사, 삼류를 일류로 만들다
유재학 감독이 지휘하는 울산 모비스는 개인기가 뛰어난 ‘스타’선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 감독은 탄탄한 조직력과 수비를 앞세운 최강 팀워크로 프로농구 리그 최강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승연, 천대현, 김현중, 김동우, 김효범, 이병석, 이창수, 우지원, 박구영 등 수많은 선수들이 유 감독의 지휘 아래 자신의 능력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법을 배워 최고의 농구선수로 성장했다. 특히나 김효범은 유 감독이 3년의 시간 투자 끝에 탄생된 최고의 보석으로 평가되고 있다. 리그 최고 슈팅가드인 김효범은 뛰어난 기량과 운동능력으로 큰 기대를 받으며 입단을 했지만 해외동포선수로 한국 적응을 실패해 개인기 위주의 농구 스타일만 구사해 원성을 샀다. 하지만 그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이가 바로 유 감독이었다. 유 감독은 3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김효범에게 투자했다. 김효범 또한 스승에 대한 보답을 코트위에서 득점으로 톡톡히 보여주고 있다.
김현중과 우승연은 어떤 선수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한때 이들도 팀에서 기대하던 자신의 기량을 찾지 못해 프로리그에 성공할 것이라고 장담한 이는 거의 없었다. 김현중은 지난 2004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전체 11순위로 큰 관심 속에서 대구 오리온스에 입단했다. 하지만 녹녹하지 않았던 프로리그에서 제 기량을 발휘 하지 못했다. 결국 이번 시즌에 모비스로 둥지를 옮겼다. 그리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모비스에서 절대 필요한 야전사량관으로 성장했다. 삼성에서 임대로 데려온 우승연은 삼성 안준호 감독이 배가 아플 정도로 이타적인 플레이를 중심으로 득점을 올리며 유재학 감독의 손길에 한 단계 이상 성장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광저우, 수비농구로 지킨다
저조하다 못해 바닥을 기고 있는 남자농구 대표팀 수장에 오른 유 감독은 “광저우아시안게임에 한국 대표팀은 철저한 ‘수비 농구’로 나설 것이다”며 “공격적으로 뛰어난 선수가 없다. 그렇다면 수비로 재무장해야한다”고 말했다.
이어 유 감독은 “레바논 등 중동 팀들 뿐 아니라 대만, 필리핀을 포함한 모든 아시아 팀들이 우리보다 한 수 위다”며 한국 남자농구의 현주소를 실감케 했다.
하지만 유 감독이 누구인가. 수를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전술을 구사한다고 해서 ‘만수(萬手)’라는 별칭을 가진 자다. ‘드림 메이커’라는 또 다른 별명도 가지고 있다. 유 감독은 항상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지도자로 유명하다.
지난 시즌, 4강안에도 못 들 것이라는 평이 많을 정도로 울산 모비스의 실력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유 감독은 예상을 뒤 엎고 당당히 리그 우승과 통합 챔피언이 됐다.
한때 아시아 남자 농구의 최고봉이었던 한국의 체면을 이번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유 감독 특유의 ‘철벽 수비’로 되살릴 수 있을지 기대된다.
[박주리 기자] park4721@dailypo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