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과 KRA(한국마사회)가 함께 하는 경마 길라잡이
말과 함께 50년…김병용·이종구 조교사
2010-06-29 기자
말을 타는 기수와 말 훈련을 책임지는 조교사로 50여 년간 뚝섬과 과천 경마장을 지켜온 예순 넷 동갑내기 김병용 조교사(47조)와 이종구 조교사(41조)가 지난 6월 27일 현역생활을 끝낸다.
당일 경주를 마지막으로 서울경마공원 시상대에서 은퇴식을 가질 예정이다. 경마역사 속에 많은 조교사들이 경마장을 떠났지만, 만 예순셋 정년까지 온전히 조교사의 자리를 지켜 은퇴식을 치룬 조교사는 서울경마공원에서 20명이 채 되지 않는다.
때문에 조교사에게 정년 은퇴식은 그 무엇보다 자랑스럽고 명예로운 무대로서 큰 의미를 가진다. 1960년대 뚝섬경마장에서부터 2010년 지금의 과천시대까지 50여 년간 오로지 한 길로 달려온 경마역사의 산 증인, 김병용 조교사와 이종구 조교사를 만나보자.
“그저 말이 좋아 함께한 세월, 뒤돌아보니 할 만큼 한 것 같다. 미련은 없다”
경마장에 바친 평생에 대해 김병용 조교사가 내린 짧은 총평이다.
안팎이 어지러웠던 4·19시절, 김병용 조교사는 중학생 어린 나이에 말을 타는 기수들의 모습에 매료되어 경마와 첫 인연을 맺었다. 지금처럼 미끈하게 생긴 경주마는 없었다. 지방에서 모은 조랑말로 경주를 하고 경주로 가운데 채소밭이 있던 시절을 보냈다. 마필관리사와 기수가 따로 구분이 없던 1인 다역 시대, 그도 한데 뒤섞여 말들을 돌봤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말에 기승해 주로를 달리기도 했다. 지난 세월을 돌이키는 김병용 조교사도 감회가 새롭다.
그의 조교사 인생 23년 10개월 간 통산전적 5085전 449승 2착 415회. 숱한 명마들이 그를 스쳐갔으련만 정작 김 조교사는 가장 기억에 남는 말로 희귀병을 앓던 ‘산수갑산’을 꼽았다. 뒷발 한 쪽이 이상이 있어 발등으로 땅을 딛던 말이었다. 수술을 했더니 다른 발이 같은 증상을 보여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그래도 승부근성이 있던 말이었다”며 “더 잘 뛰었던 말도 많았지만 내게는 그만큼 맘에 차는 말은 없었다”고 말을 추억했다. 조금 모자란 자식에 애착을 쏟는 것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게다.
뒤돌아보면 뚝섬 시대를 거쳐 과천으로 오기까지 경마산업은 화려하게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만큼 마필관리, 조교의 노하우 등은 발전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김병용 조교사는 조언했다. 외실만큼 내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경마인생을 마감하는 김병용 조교사의 마지막 따끔한 일침이었다.
말 이야기만 하는 경마사
이종구 조교사는 1963년, 이종구 조교사도 뚝섬 경마장 기수에 관심을 가지던 중, 알고 지내던 선배의 주선으로 경마 인생을 시작했다. 기수로 서서히 자리를 잡은 그는 1987년 조교사로 개업하고 23년간 41조 마방을 이끌었다.
이종구 조교사의 통산 전적은 5372전 488승 2착 490회. 그간의 기억을 더듬다 그는 ‘울프 사일런서’를 기억에 남는 말로 꼽았다. 99년 마주협회장배 대상경주 우승을 꿰어 찬 말이었다. 다음 해 야심차게 2연패를 준비했으나 코차로 2착했던 때 무척 많이 아쉬웠다고 했다.
이종구 조교사는 큰 위기도, 굴곡도 없이 순탄하게 살아온 것 같다고 지난 세월을 평가했다. 그에게 있어 지금, 무난하게 조교사 일을 하다가 정년에 은퇴할 수 있음이 가장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경마 인생을 통틀어 가장 힘들었던 때가 자신 말이 아팠던 때, 기대했던 만큼 잘 뛰어주지 못했던 때였다며 온통 말 이야기만 늘어놓는 이종구 조교사. 은퇴를 앞둔 소회를 물어도 ‘시원섭섭하다’고 담백하게 말하고 웃는 그의 모습에서 한 길을 묵묵히 걸었던 ‘호스맨’의 면모가 엿보인다.
한국경마 여명의 시기에서부터 50여년, 오롯이 인생을 바친 그들의 삶이 지금의 경마를 만든 것이다. 한 때를 풍미하고 뒤돌아서 나가는 두 조교사의 뒷모습이 빛나는 이유이다.
[K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