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환·이동국 ‘잊혀진 킬러’의 앞날은?
“귀 틀어막고 창끝 다듬어야 길 보인다”
2009-07-14 이수영 기자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를 풍미한 축구계 ‘올드보이’를 그리워하는 팬심이 요동치고 있다. 2010 남아공월드컵을 목전에 뒀지만 현재 대표팀에는 확실한 ‘득점기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주영, 이근호 등 신예 킬러들이 감각을 키우고 있지만 골 가뭄에 허덕이는 대표팀의 사기를 반전시킬 만큼의 파괴력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최근 안정환, 이동국으로 대표되는 2000년대 ‘올드보이 킬러’들의 귀환이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다. 2010년까지 중국 다롄과 계약을 연장한 안정환(33·다롄 스더)은 현지에서 ‘국왕’칭호까지 받으며 득점력을 뽐내는가 하면 ‘라이언킹’ 이동국(30·전북현대)은 2번의 해트트릭을 포함해 무려 11골을 몰아넣으며 득점선두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한국 최고 공격수로 이름을 날린 두 킬러가 화려하게 부활한 가운데 이들의 대표팀 재 승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켜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왕년의 ‘올드보이’가 태극마크를 다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안정환과 이동국 모두 “젊은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겠다”며 대표팀 은퇴를 시사하고 있는데다 최근 허정무 국가대표팀 감독의 발언이 두 노장 공격수의 마음에 적잖은 상처를 남긴 까닭이다. 허정무 국가대표팀 감독은 지난 6일 “이동국이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넣은 골이 몇 개나 되느냐”며 직격탄을 날렸다. 허 감독은 “(이동국이)대표팀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축구계에는 ‘10년 마다 슈퍼스타가 등장한다’는 말이 정설처럼 존재한다. 한국 축구사에는 10년을 주기로 최고의 선수들이 등장하고 또 사라졌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선수가 나오고, 성장해 최고의 전성기로 올라가는 데까지 보통 10년 정도가 걸리는 까닭이다.
특히 화려한 기술과 득점력을 자랑하는 스트라이커의 인기는 예나 지금이나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960~70년대 ‘황금다리’ 이회택을 시작으로 1970~80년대를 풍미했던 ‘갈색폭격기’ 차범근, 1980년대 ‘그라운드 저격수’ 최순호와 ‘야생마’ 김주성 등이 한국축구의 공격수 계보를 이어왔다.
남아공에서 다시보고 싶은 스타 1위
황선홍, 최용수가 주름잡은 1990년대에 이어 2000대는 한국축구의 ‘르네상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준수한 외모와 실력을 겸비한 안정환, 이동국의 등장은 2002 한일월드컵을 정점으로 국내 축구사의 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었다.무엇보다 안정환의 최근 행보가 눈에 띤다. 안정환은 지난 3월 중국 프로축구 다롄 스더로 이적해 13경기에 나서 5골을 기록했다. 득점 순위 6위로 팀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안정환은 한국, 일본에 이어 중국에서도 30골 이상을 넣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안정환은 중국에서 축구계의 한류스타로 통한다. 현지 축구팬들이 그를 ‘국왕’으로 부를 정도다. 안정환의 소속팀인 다롄은 최근 서포터스가 제작한 안정환의 응원 걸개그림을 공개했다. 안정환의 사진이 인쇄된 이 그림에는 한국어로 안정환에 대한 ‘찬가’가 적혀있다. 본인이 알아보기 쉽도록 조선족의 도움을 받아 우리말로 제작한 정성이 엿보인다.
‘우리는 진심으로 정환씨가 대련팀에 계속 머물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대련팀에 새로운 킹이 필요합니다. 우리 대련은 당신을 다시 정상에 올리고 임금의 느낌을 찾고 싶습니다. 우리도 국왕처럼 정환씨를 추앙합니다.’
다롄에 부는 안정환 열풍은 다른 게 아니다. 13경기 중 5골-2도움을 기록한 안정환은 홈경기마다 골을 터트리며 다롄에 ‘안방불패’ 기록을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안정환이 넣은 5골은 모두 홈에서 터졌다. 다롄은 총 7차례 홈경기에서 6승1무의 무패행진을 달리고 있다. 이 가운데 안정환은 4경기에서 골을 터뜨렸고 3경기는 결승골을 기록했다.
특히 안정환은 지난달 내년까지 계약 연장을 한 이후 관중의 박수를 유도하거나, 독특한 세리머니를 선보이는 등 팬 서비스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최근 그가 축구팬들이 뽑은 ‘남아공월드컵에서 다시 보고 싶은 올드스타’ 1위로 선정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안정환 “젊은 대표팀에 내 자리 없다”
축구전문지 <베스트일레븐>과 다음 스포츠가 지난달 ‘남아공월드컵 D-365, 대표팀 재 발탁이 가장 기대되는 선수는’이라는 주제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축구팬들은 안정환의 대표팀 재 승선을 가장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일 월드컵과 독일월드컵에서 잇따라 골맛을 보며 월드컵 영웅으로 추앙받은 안정환은 전체 2454명의 투표 참여자 중 21.7%에 해당하는 533명의 지지를 받아 9명의 후보를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안정환은 다른 후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20% 이상(21.7%)의 지지율을 보이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는 지난 2번의 월드컵에서 통산 3골을 기록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대표팀의 경험치가 일천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국제대회 경험이 풍부한 안정환의 노련함이 높은 가치를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정환은 최근 대표팀 승선의 꿈을 접었음을 확실히 밝혔다. 사실상 대표팀 은퇴의사를 밝힌 것이다. 그는 중국 수퍼리그 휴식기를 맞아 지난 6일 귀국했다. 안정환은 귀국 직전 신징바오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한국대표팀은 어린 선수들이 성장해 좋은 결과를 내고 있다. 나 같은 선수는 빠지는 게 당연하다”고 밝혔다.
그는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대표팀에서 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미 젊어진 대표팀에 합류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는다. 작년 6월 (2년 만에) 대표팀에 합류한 것도 감격적이었다. 후배들이 남아공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작정한 독설 허정무 vs 상처받은 이동국
“이동국이 직접 만든 골은 많지 않다. 대표팀에 들어왔을 때 더 잘할지 의문이 든다.”
K리그 득점 선두를 달리고 있는 이동국은 최근 허정무 감독에게 자존심을 짓밟혔다. 잉글랜드에서의 실패를 인정하며 한국으로 돌아온 이동국은 성남을 거쳐 이번시즌 전북현대의 상승세를 이끄는 주축선수로 자리매김했다.
전성기 버금가는 골 감각을 떨치는 그를 두고 자연스럽게 대표팀 발탁 논의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허정무 감독의 반응은 냉정하다 못해 싸늘하기까지 했다.
허 감독은 회견에서 “이동국이 (대표팀에) 들어왔을 때 더 잘할지 의문이다. K리그에서 11골을 넣었지만 스스로 만든 골은 많지 않다. 더 날카로운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평했다. 과거 ‘게으른 천재’라는 오명에 시달렸던 이동국에게는 확인사살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전에 없이 강경한 허 감독의 악평에 일각에서는 ‘선수의 사기를 자극하기 위한 심리전’이라는 의견과 ‘리그 득점 1위에게 막말을 해 자존심을 짓밟았다’는 비난이 교차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동국 본인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 그러나 그의 가족과 측근들은 허 감독의 말이 지나치다며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동국의 소속팀인 전북현대 최강희 감독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허 감독이 이동국의 최근 경기를 보기는 한거냐”며 격한 감정을 토로했다.
최 감독은 “FC서울과의 FA컵 16강전 두 번째 골과 주말 정규리그 광주 상무전 세 번째 골을 봤다면 이동국에게 그런 말들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동국이 주워 먹는 골 밖에 넣지 못한다니 기가 막힌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골을 만들어낼 줄 아는 공격수라는 게 메시나 호날두처럼 2∼3명을 제친 뒤 골을 넣는 선수를 말하는 것인가. 그런 선수는 잉글랜드나 스페인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라며 이동국을 감쌌다.
최 감독에 따르면 이동국은 겨울 전지훈련과 시즌 초 적응에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완전히 자신의 페이스를 찾은 상태다. 최 감독은 “최전방에서 날카로운 움직임, 슈팅 타이밍 모두 기가 막힐 정도다. 수비 가담 역시 많이 늘었다. 이동국의 경기를 매일 보는 내가 가장 잘 안다. 편견을 버려 달라”고 강조했다.
이동국의 부친 이길남씨도 아들을 ‘폄하’한 허 감독의 회견 내용에 불만을 표했다. 이씨는 최근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허 감독이 아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떨쳐버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이씨는 “뽑을 생각이 없으면 안 뽑으면 되지 굳이 골 숫자까지 거론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는 선수의 기를 꺾을 필요까지 없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이동국 역시 최근 인터뷰에서 대표팀 승선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이동국은 “조커로 투입될 바에는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이 낫다”고 말해 ‘올드보이 킬러’들의 월드컵 사냥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