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 & 최향남 엇갈린 ‘거위의 꿈’
‘올드 루키’의 반란은 끝나지 않았다
2009-05-26 이수영 기자
불혹을 앞둔 ‘코리안 특급’ 2인의 미국 야구 정복기가 한창이다. 적은 연봉과 불안한 보직이지만 ‘큰 무대에 서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험난한 도전을 선택한 것이다. 9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특급 투수로 ‘메이저리그 1호’의 명성을 날린 박찬호(37·필라델피아)는 최근 선발 명단에서 제외되는 굴욕을 겪었다. 그러나 불펜에서 ‘백의종군’할 뜻을 밝혀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또 생애 마지막이 될지 모를 빅리그 진출 꿈을 버리지 못한 최향남(39·앨버커키 아이소토페스)은 세인트루이스에서의 방출 아픔을 딛고 마이너리그에서 노련한 피칭을 선보여 팀의 주축으로 자리잡아가는 중이다. 불혹 투수들의 인생 2막. 남다른 도전기로 희망을 이어가는 박찬호와 최향남의 근황을 들여다봤다.
양극단을 오가는 ‘롤러코스터 피칭’에 몰려 결국 선발 자리에서 물러난 박찬호. 라이벌에게 5선발 보직을 내주고 불펜행이 확정됐지만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구원투수로 경기 감각을 유지하면서 언제든 선발 등판 기회를 다시 잡을 수 있도록 몸을 만들겠다는 각오다.
박, 불펜서 숨고르기 “오히려 잘됐어!”
AP통신과 필라델피아 지역 언론들에 따르면 박찬호는 지난 20일 팀으로부터 불펜행을 통보받았다. 박찬호의 빈자리는 시범경기 때부터 그와 경쟁했던 J. A. 햅(27)이 채운다.
박찬호의 선발 탈락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필라델피아 지역 언론은 지난 4월 박찬호가 네 번의 선발 등판에서 이렇다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자 줄곧 햅의 기용을 주장했던 것. 지난 2일 박찬호가 메츠를 상대로 5이닝 만에 7점을 대량실점하자 그를 신뢰했던 팀도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필라델피아는 지난 18일 박찬호가 워싱턴전에서 불과 2이닝도 채 던지지 못한 상황에서 볼넷 4개를 남발하자 결심을 굳힌 것이다. 박찬호의 지금까지 시즌 성적은 1승 1패 방어율 7.08. 메이저리그 통산 100승을 달성한 코리안 특급의 성적표로서는 불합격에 가깝다.
박찬호 본인도 MLB.com과의 인터뷰에서 “실망스럽다”며 본인의 실투를 인정했다. 그는 “부담스러웠다. 시즌이 시작된 뒤에도 시범 경기를 치르는 것 같았다”며 남다른 부담감을 털어놓았다.
박찬호는 “‘선발로 계속 던질 수 있는가’란 질문을 줄기차게 받아 스스로 많은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며 “불행스럽게도 즐거운 마음으로 던지지 못했다”고 밝혔다. 치열한 경쟁과 자신에게 쏟아지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털어내기에 적잖은 괴로움이 있었다는 얘기다.
‘특급’ 무너트린 ‘최악의 피칭’ 원인 세 가지
지난 18일 워싱턴전은 박찬호에게 있어 굴욕에 가까운 경기였다. 선발 등판해 고작 1.1이닝 동안 안타 5개에 볼넷 4개, 5득점을 내주며 강판되기까지의 과정은 치욕스러웠다. 박찬호의 실투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와 손발을 맞추는 수비수들의 집중력 저하가 첫 번째 원인이었다. 1회 3점을 리드하며 마운드에 오른 박찬호. 그러나 선두타자에게 초구 안타를 맞았고 후속타자에게도 풀카운트 좌전 안타를 얻어맞았다. 후자는 병살로 처리할 수 있었지만 유격수의 실수로 온전한 실점기회를 내준 것이다.
현지 중계진은 “양팀 수비수들이 전날 더블헤더에 이은 낮 경기를 치르느라 전체적으로 집중력이 떨어져있다”고 평가했다.
수비수의 자책과 더불어 박찬호 역시 씻을 수 없는 폭투 원인을 갖고 있었다. 박찬호의 장기인 빠른 직구가 전혀 먹혀들지 않은 것이다. 이날 박찬호는 단 한번 최고구속 148km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평소보다 2~3km 정도 구속이 떨어지자 박찬호는 직구대신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등 변화구로 승부수를 던졌다.
그러나 이미 위력을 잃어버린 박찬호의 공은 번번이 상대 타자들에게 읽혔고 줄줄이 안타와 실점으로 이어졌다. 박찬호는 경기 직후 가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경기 전 불펜에서 포심 패스트볼이 괜찮았다. 그런데 첫 두 타자에게 포심 패스트볼을 맞으면서 계획을 바꿨음에도 제구가 잘 되지 않았고 자신감을 잃었다”고 밝혔다.
마지막 원인은 박찬호가 좁은 스트라이크존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경기 구심은 매우 좁은 스트라이크존으로 좌·우 꽉찬 코스는 거의 잡아주지 않았다. 결국 박찬호는 구심의 좁은 스트라이크존에 당황해 1.1이닝 동안 무려 63개의 공을 던지고도 스트라이크는 32개를 잡는데 그쳤다.
극심한 기복으로 선발 자리를 놓쳤지만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박찬호는 “선발 기회를 준 팀에게 감사한다”며 “불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생각해야 한다. 팀이 나에게 구원투수를 맡긴 만큼 최선을 다할 것이다”는 각오를 밝혔다.
방출 뒤 첫 승 신고 ‘최향남 전성시대’
박찬호가 내리막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면 풍운아 최향남은 고진감래의 기쁨을 조금씩 맛보고 있다.
LA 다저스 산하 트리플A 앨버커키 아이소토페스에 입단한 최향남은 첫 등판에서 승리투수를 따내며 역량을 뽐냈다. 지난 3월 세인트루이스와 어렵사리 계약을 마무리 지었음에도 시범경기가 끝나자마자 방출되는 아픔을 겪은 최향남에게 이번 승리는 메이저리그로 가는 마지막 티켓이나 다름없었다.
최향남은 지난 19일 첫 챈시파크에서 열린 플레스노 그리즐리스와의 원정 경기에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해 2.3이닝을 2안타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첫 승을 거뒀다. 팀이 10-2로 앞선 3회 마운드에 오른 최향남은 특유의 컨트롤로 상대 타선을 잠재우며 4개의 삼진을 뽑아내기도 했다.
최향남의 미국 진출기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지난 1월 포스트시스템을 통해 세인트루이스와 월봉 7500달러(약 900만원)에 계약한 최향남은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방출’이라는 쓴잔을 맛봤다. 당시 임의탈퇴 신분으로 롯데 복귀조차 불가능한 상황.
그의 전 소속팀이었던 롯데는 본인이 원한다면 2군에라도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최향남은 한국행 비행기를 찾지 않았다. 제리 로이스터 롯데 감독 역시 최향남과의 의리를 지켜 백방으로 그를 받아줄 팀을 수소문하기도 했다.
결국 최향남은 로이스터 감독의 배려와 에이전트의 도움으로 LA 다저스의 위성구단은 앨버커키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의 나이는 만 38세. 불혹을 코앞에 둔 최향남의 무한도전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