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잔인한 5월’은 간다
WBC 4강, 그리고 2개월…“모든 것이 변했다”
2009-05-20 이수영 기자
그야말로 잔인한 5월이다. 치명적인 빈볼 시비로 불거진 열성팬의 그라운드 난입 탓에 한 바탕 곤욕을 치르더니 잘나가던 태극전사들이 줄줄이 부상병동으로 호송되며 혹독한 봄날을 보내고 있다.특히 베이징 올림픽에서 최악의 폭투를 선보이며 자신감을 잃은 한기주(22·KIA)가 3년 만에 2군으로 추락하는 등 이름깨나 떨치는 스타급 선수들의 2군 러시마저 줄을 잇는 상황이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의 감동이 휩쓸고 지나간 지 꼭 2개월. 상처뿐인 레이스를 이어가는 프로야구계의 한숨소리를 집중 조명했다.
가장 잔혹한 5월을 맞은 주인공은 ‘불의 신’ 한기주다. 2006년 화려한 조명을 받고 KIA에 입단한 한기주는 초특급 신인, 그 이상이었다. 당시 한기주의 계약금 10억원은 역대 프로야구 신인으로서는 사상 최고의 몸값이었다.
한기주 “실직가장 마음 알 것 같아”
그러나 한기주는 이후 프로에서 인생 최대의 시련을 맛봤다. 동기생 류현진(22·한화)과 1년 후배 김광현(21·SK)에 밀려 만년 3인자에 만족해야 했던 것.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나섰지만 고질적인 부상에 시달리던 팔꿈치가 문제였다. 한기주는 올해 팔꿈치 때문에 포스트 시즌 이후 훈련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늘어나는 것은 몸무게뿐이었다.
지난 9일 한기주를 2군으로 끌어내린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체중증가에 따른 허리 통증이었다. 2군 강등은 신인이던 2006년에 이어 데뷔 후 두 번째다. 조범현 KIA 감독은 “언제 불러올릴 수 있을지 지금으로선 모르겠다”며 답답해하고 있다. 팀이 어렵지만 한기주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닌 만큼 서두르지 않겠다는 뜻이다.
육체적인 통증 못지않게 한기주를 괴롭히는 것은 마음의 상처다. 마치 불경기에 자리에서 밀려난 실직가장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 것. 마무리는 윤석민, 셋업은 유동훈, 손영민, 임준혁이 버티고 있는 탓에 그의 선발 출전은 무리수다.
채병용 빈볼에 ‘꼴리검’ 나섰다
당장 일감을 잃은 한기주가 할 수 있는 것은 부상치료와 자신감을 되찾는 것 뿐이다. KIA의 한 관계자는 “한기주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던질 수 없는 정도도 아니다”며 “시즌 초반 부담감이 크다.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5월 야구판을 가장 뜨겁게 달군 이슈 키워드는 다름 아닌 ‘꼴리검’ 소동이다. ‘꼴리검’이란 ‘꼴찌롯데+훌리건(과격 스포츠팬)+장난감 검’을 합친 말이다. 지난 6일 롯데와 SK의 사직경기에서 롯데 열성팬 박모(35)씨가 장난감 칼을 휘두르며 그라운드로 난입한 사건을 빗대 인터넷 유행어로 자리 잡기까지 했다.
양 팀의 볼썽사나운 갈등은 지난달 23일 롯데의 주장 조성환이 SK와의 원정경기에서 채병용의 볼에 얼굴을 맞아 골절상을 입는 것으로 시작됐다. 여기에 지난 6일 롯데가 SK 15연패라는 치욕을 기록하자 성난 롯데 팬들이 곳곳에서 충돌하며 소동을 일으켜 보는 이를 씁쓸하게 했다.
지난 6일 밤 9시 45분쯤 부산 사직야구장 선수단 출입구 앞에서 SK와이번스 선수단이 탄 버스가 출발하던 도중 신원을 알 수 없는 관중이 던진 소주병이 버스로 날아와 왼쪽유리 1개가 깨졌다.
롯데는 지난달 23일 문학 SK전에서 주장 조성환이 안면이 함몰되는 골절상을 입으면서 감정의 앙금이 생긴 차. 여기에 SK 박재홍이 몸쪽 무릎으로 오는 투구에 빈볼이라고 판단해 마운드로 뛰어가 롯데 투수 김일엽에 위협을 가했다.
이날 결국 양 팀 선수단이 그라운드로 몰려 대치하는 벤치 클리어링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박재홍이 공필성 롯데 코치에게 욕을 한 데 대해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김성근 SK 감독이 제리 로이스터 롯데 감독에게 공식 사과하고 박재홍 역시 공코치와 앙금을 풀었다.
그러나 SK와 사직벌에서 3연전을 벌인 롯데가 지난 6일 2차전에서도 SK에 3-6으로 패해 SK상대 15연패라는 참패를 기록하자 일부 롯데팬들의 감정적인 대응에 불을 붙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갖가지 사건사고들로 얼룩진 야구계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각 팀에 몰아닥친 부상 열풍이다. 각 팀의 주전들이 잇따라 다치면서 시즌 초반 전력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선수들의 부상 파동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곳은 한화 이글스와 롯데 자이언츠다. 한화는 중심타자 김태균과 이범호의 잇따른 부상으로 최근 6연패를 당해 국민감독의 속을 태우고 있다.
김태균은 지난달 26일 두산 베어스와 경기에서 홈에 쇄도하다 포수와 부딪히면서 뒤통수를 그라운드에 찧었다. 이범호도 지난 3일 KIA 타이거즈전에서 무릎을 다쳤다. 이들은 최근 팀에 복귀하긴 했지만 여전히 부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부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지난해 한국야구 흥행을 이끌었던 롯데. 주장 조성환을 잃은 롯데는 공격력 강화를 위해 영입한 홍성흔까지 최근 왼쪽 허벅지 부상으로 2군으로 내려 보낸 것.
두산 베어스와 KIA도 부상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2루수 고영민이 지난 9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화전에서 전력 질주하다가 베이스를 잘못 밟아 오른쪽 발목 인대를 다쳤고, 외야수 이종욱도 피로와 왼쪽 팔꿈치 부종으로 1군에서 제외됐다.
KIA는 에이스 서재응이 최근 오른쪽 팔꿈치 부상으로 빠진데다 중간계투 한기주도 허리 통증으로 최근 2군으로 내려 보내 한숨을 쉬고 있다.
‘왼손 투수지만 괜찮아’ 김광현vs류현진
힘겨운 레이스를 펼치고 있는 2009 시즌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20대 신예 김광현과 류현진의 한층 더 공고해진 자존심 대결이다.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주역이자 세기의 라이벌은 두 사람은 최근 왼손 투수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며 마운드를 주름잡고 있다.
김광현은 지난 10일 히어로즈전에서 시즌 5승째를 챙기며 류현진과 다승 공동 선두에 올랐다. 김광현은 최근 4경기에서 모두 퀄리티스타트(선발 6이닝 이상·3자책점 이하)로 4연승을 거뒀다. 지난해 투수 2관왕(다승·탈삼진)과 시즌 MVP를 차지했던 위력을 되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류현진은 지난 9일 잠실 두산전에서 시즌 첫 패를 당하며 연승 행진을 5승에서 멈춰 방어율이 3.86로 높아졌지만 탈삼진 부문에서 여전히 1위(50개)를 굳게 지키고 있다.
왼손 투수들의 활약은 비단 두 사람 뿐만이 아니다. 방어율 1, 2위를 다투고 있는 히어로즈 이현승(1.67)과 KIA 양현종(1.86)은 1점대 방어율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왼손투수다. 방어율 5위를 달리고 있는 LG 봉중근(2.44)도 무시할 수 없다. 삼성 오승환이 10세이브로 1위에 올라있는 구원 부문을 제외한 다승·방어율·탈삼진·홀드 등 마운드의 주요 부문을 왼손투수들이 장악하고 있는 셈이다.
불과 몇 년 사이 한국 프로야구 마운드의 선두 그룹은 ‘좌완’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무엇보다 국내에 뛰어난 왼손 타자들이 많아지면서 어릴 때부터 왼손투수 육성이 많아진 때문으로 보인다.
류현진. 김광현 등도 이 같은 추세의 산물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또 과거에는 왼손하면 기교파가 많았지만 요즘은 구속 150㎞대의 강속구를 뿌리는 정통파 투수들이 많아져 왼손 투수 강세 정국을 더욱 공고히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