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포착 ‘국민타자’ 울린 수십억 사기사건 전모

“수십 배 불려준다는 말 믿었다 생돈만 날렸다”

2009-01-21     이수영 기자

지난해 말 도박 파문으로 홍역을 앓았던 야구계가 이번엔 수십억원에 달하는 거액 사기 사건에 휘말렸다. 수년 간 프로야구 ‘광팬’을 자청하며 야구스타들의 자산관리자로 활약해왔던 유명 증권사 직원 홍모(36)씨가 고객 투자금 30여억원을 횡령했다 최근 구속된 것이다. ‘국민타자’ 이승엽과 ‘기록제조기’ 양준혁, ‘돌부처’ 오승환 등 국보급 스타들이 홍씨의 단골 이었다. 특히 지난 시즌 ‘팬티 세레머니’로 화제를 일으켰던 SK 와이번스 이만수 코치는 홍씨의 사기행각에 수억원의 거액을 날린 사실이 드러나 곤혹을 치르고 있다. 대한민국 야구영웅들을 울린 홍씨의 기막힌 사기극 전모를 단독 취재했다.

홍씨의 단골 고객 리스트를 들여다보면 ‘올스타전’을 방불케 할 정도다. 이승엽, 양준혁, 오승환 등 현역 선수 뿐 아니라 ‘헐크’ 이만수 코치, 이선희 코치 등 이름만 대면 금방 알 수 있는 유명 인사들이 망라돼 있다. 특히 이만수 코치는 이번 사건 피해자 가운데 가장 많은 돈을 사기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 29명…스타 수두룩

문제의 홍씨는 외국계 기업인 M증권 차장으로 근무했던 인물이다. 그는 경제 전문 일간지와 케이블 TV 프로그램 등을 통해 투자 전문가로 유명세를 떨치며 상당한 영향력을 자랑한 재원이었다.

특히 ‘야구선수 전문자산 관리자’로 알려진 뒤 몇몇 일간지는 그와의 인터뷰 기사를 싣기도 했다. 대구지역 지사에서 일하던 홍씨는 오래 전부터 대구를 연고로 한 삼성 라이온스의 팬을 자처해왔다. 홍씨는 국민타자 이승엽의 게임을 보기 위해 직접 도쿄돔을 찾을 만큼 열성적인 야구팬이었다.

문제는 홍씨가 인기 선수들을 단골 고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야구장 출입에 열을 올린 게 아니냐는 것이다. 업계에 정통한 소식통은 “홍씨가 각 구단 연간 회원권을 사 모으며 치밀한 작전을 세워 선수들에게 접근했다”고 전했다.

홍씨가 자신의 인지도와 실적을 부풀리기 위해 인기 선수들을 상대로 적잖은 ‘작업’을 했다는 얘기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홍씨는 지난 200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이승엽의 경기를 보기 위해 직접 일본까지 날아갔다.

이 자리에서 홍씨는 이승엽의 부친을 만났고 그를 통해 이승엽을 자신의 고객 리스트에 올릴 수 있었다. 이승엽의 부친은 누구보다 홍씨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홍씨는 또 지난해 5월 SK 와이번스 이만수 코치의 22번 유니폼을 경매를 통해 122만원에 낙찰 받아 이 코치와 기념촬영을 하는 등 눈에 띄는 행보를 계속해왔다. 이 코치 역시 홍씨의 오랜 VIP급 고객이다.

현재 경찰이 파악한 피해자수는 29명. 이 코치를 포함한 수많은 야구계 인사들이 속을 태우고 있는 셈이다.


M증권 “홍씨 실적 별로였다”

고객 돈 30여억원을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던 홍씨는 이달 초 검거됐다. 구속된 홍씨와 피해자들에 대한 수사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진행 중이다. 취재결과 홍씨의 단골고객 가운데는 야구스타뿐 아니라 일부 연예인도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M증권사 관계자에 따르면 알려진 것과 달리 홍씨의 실적은 별 볼일이 없었다. 이승엽, 양준혁 등 스타들의 이름을 팔아 유명세를 떨친 것은 사실이지만 실질적인 수익률은 별로였다는 얘기다.

이 관계자는 “홍 전 차장이 유명 야구선수들을 특별 관리해온 것은 많지만 실적이 뛰어나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며 “회사 차원에서 선발하는 우수 직원에는 단 한번도 선정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M증권사는 이미 지난해 말 홍씨의 횡령 사실을 파악한 상태였다. 홍씨와 개인적인 거래만 했던 일부 피해 고객이 직접 M증권사 지점을 찾아와 사기 사실을 알리면서 그의 수법이 수면위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M증권사는 지난 연말 홍씨를 상대로 한 특별감사를 벌여 범행 전모를 포착했다. 홍씨는 고객들을 상대로 회사 양식과는 전혀 다른 계약서를 위조해 작성하게 하고 자신의 개인 계좌로 고객 돈을 관리했다. 그는 이 가운데 일부인 30여억원을 개인적으로 빼돌렸다. M증권사는 감사 결과가 발표된 즉시 홍씨를 면직조치했다.

한때 ‘재테크 전도사’로 야구선수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홍씨가 사기꾼으로 전락하자 2009년 신년 야구계는 소리 없는 한숨으로 들썩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