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BC 사령탑 ‘폭탄 돌리기’ 내막
‘독이 든 성배’ 누가 마시고 싶겠나?
2008-11-13 이수영 기자
SK와이번스의 2연패로 500만 관중 신화를 다시 쓴 한국 야구계가 새로운 내홍에 휩싸였다. 2006년 ‘야구월드컵’으로 불리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 신화를 이룩한 이래 두 번째 사령탑을 맡아줄 굵직한 명장들이 줄줄이 뒷걸음질 치고 있는 까닭이다. 한국야구위원회 기술위원회는 지난 5일 오후 긴급회의를 갖고 김인식(61·한화 이글스) 감독을 WBC 사령탑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영광을 일군 명장의 귀환이란 점에서 명분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불과 하루 전 WBC 감독으로 내정됐던 ‘야신’ 김성근(66·SK 와이번스)감독이 고사하는 등 유력 후보들이 줄줄이 손사래를 친 사령탑 선임 과정의 모양새는 그야말로 엉망이 됐다. 일각에서는 재일동포 출신으로 야구계에서 대표적 비주류 인사로 꼽히는 김성근 감독에게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독이 든 성배’를 억지로 권했다는 주장도 나와 논란이 예상된다.
KBO는 지난 5일 서울 도곡동 야구회관에서 기술위원회를 열고 WBC 대표팀 감독 선임에 대한 논의 끝에 김인식 감독을 대표팀 사령탑으로 추대했다. 하루 전 김 감독을 대표팀 사령탑으로 내정했던 KBO는 사실상 김성근 감독을 단독 후보로 내세웠지만 24시간도 채 안돼 입장을 바꾼 것이다.
하일성 총장 등 KBO 고위층은 김성근 감독을 직접 만나 WBC 감독직을 공식 제의할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 같은 만남도 무산됐다. 김성근 감독은 건강상의 이유로 대표팀 지휘봉을 잡을 수 없다는 입장을 재차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WBC 감독 선임은 지난 8월 베이징올림픽이 끝난 뒤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돼 왔다. 그러나 1순위 후보로 꼽힌 올림픽 대표팀 김경문 감독은 “소속팀과 대표팀을 동시에 이끌기가 힘들다. 한국시리즈 우승팀 감독이 맡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라며 포스트 시즌 동안 이미 고사 의지를 밝힌 바 있다.
꺼림칙한 김성근 감독
KBO 모 관계자는 “전직 감독들 가운데 한 명을 택해 전임 감독제를 시행하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현실적으로 현직에 있는 감독을 선임하는 것이 장점이 더 많다고 판단했다”며 “일본도 WBC 감독을 호시노(전 한신) 감독에서 하라(현 요미우리) 감독으로 바꾼 것을 보면 우리를 따라온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밝혔다.
문제는 김성근 감독이 대표팀 감독 내정을 뿌리치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다는 점이다. 김 감독은 지난달 31일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 지은 뒤에도 WBC 감독직에 대해 “나는 그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거절의 뜻을 밝힌 바 있다.
김 감독과 함께 강력한 대표팀 수장 후보로 이름을 올린 김경문 감독은 ‘소속팀 운영에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선동렬(삼성 라이온스) 감독은 ‘하고 싶은 사람이 해야한다’는 이유로 줄줄이 퇴짜를 놨다.
감독도 손사래 치는데 선수마저
일반적으로 ‘야구월드컵’으로 불릴 만큼 권위 있는 대회인 WBC 사령탑은 야구 지도자에게 있어 상당한 명예직이다. 그럼에도 현직 감독들은 대표팀 사령탑에 대해 ‘독이 든 성배’보다 더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KBO가 반강제로 대표팀 사령탑에 앉히려던 김성근 감독의 속내는 좀 더 복잡하다. 김 감독은 “대표팀을 맡아 좋은 성적을 냈던 분들이 다시 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2006년 WBC 4강 신화를 이끈 김인식 감독과 김경문 감독을 염두에 둔 말이다. 이어 “나는 들꽃이다. 그런 곳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말 그대로 김성근 감독은 KBO를 중심으로 한 야구계 주류와 적잖은 거리를 둬왔다. 현 KBO 내부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학연과 지연이 만연한 야구계 내에 재일동포 출신으로 적을 두지 않았다는 점이 컸다.
SK 와이번스 사령탑을 맡기 전까지 수십년 동안 ‘야인’생활을 해왔던 김 감독은 최근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관심과 대표팀 사령탑 내정설에 곤혹스러운 눈치다. 일각에서는 “비주류인 김성근 감독을 대표팀 사령탑으로 앉힌 뒤 모든 책임을 그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속셈”이라며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주장도 있다.
KBO는 김성근 감독 선임이 불발되자 곧장 김인식 감독을 추대하는 쪽으로 대안을 삼았다. 김인식 감독은 부임 요청 전화를 받고 “갑자기 왜 이렇게 됐는가” 라며 황당함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감독은 1회 WBC 대회 이후 사실상 대표 감독 은퇴를 선언했지만 3년 만에 ‘떠밀리듯’ 대표팀으로 돌아온 것이다.
대표팀 감독직이 부담스러운 것은 누구보다 김인식 감독이다. 내년 한화와의 계약이 끝나는데다 팀 전력은 부임 이래 최악의 상황이다. 김성근 감독이나 김경문 감독에 비해 오히려 어려운 모양새다. 뇌경색으로 사경을 헤맸던 만큼 건강 문제역시 무시할 수 없다.
KBO의 행보 역시 비판 대상으로 떠올랐다.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뒤 화두로 떠오른 WBC 사령탑 문제를 일찌감치 마무리 지어 원칙에 따라 해결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한편 감독 선임 과정에서 볼썽사나운 ‘떠넘기기’ 작태를 보인 만큼 대표팀 선수 소집에도 적잖은 난항이 불거질 전망이다. 박찬호가 내년 시즌 선발 확보를 위해 WBC 불참 의사를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거포 김동주 역시 대표팀 은퇴 의사를 분명히 했다.
올해 FA로 막대한 수익을 눈앞에 둔 박진만, 이진영, 손민한 등 특급선수들도 몸관리를 이유로 대표팀 합류가 탐탁찮은 눈치다. 일선 감독들이 모두 손사래를 친 상황에서 떠밀리듯 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김인식 감독의 카리스마가 대표팀에서 그대로 발휘될 지도 의문이다.
라이벌인 숙적 일본은 일찌감치 WBC 감독으로 이승엽의 스승인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감독을 임명한 상태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하라 감독은 내년 2월 15일 미야자키에 선수들을 소집, 훈련에 들어갈 예정이다. 우리가 감독 선임과 선수 차출 문제로 내홍을 겪고 있는 사이 WBC 디팬딩 챔피언인 일본이 한발 앞서 훈련 스케줄을 확정한 것이다.
당초 일본 대표팀은 괌에서 합숙 훈련을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우천시 이용할 수 있는 돔구장과 실내 연습시설이 부족해 하라 감독의 권한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캠프지인 미야자키를 합숙장소로 선택했다.
미야자키는 괌에 비해 이동 시간이 짧고 요미우리를 비롯해 소프트뱅크 호크스, 세이부 라이온즈 등 프로 팀들과 실전 연습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각광받은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