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 떠난 스타들 고단한 ‘두 번째 인생’
‘제2의 이호성’ 또 나온다
2008-03-19 이수영 기자
‘국민적 야구영웅’에서 ‘희대의 살인마’로 낙인찍힌 이호성의 범행 동기는 돈 문제였던 것으로 경찰조사결과 드러났다. 1990년대 해태타이거즈 전성기를 이끈 ‘4번 타자’ 이호성은 2001년 은퇴한 뒤 사업가로 변신, 화려한 두 번째 인생을 사는 듯 했다. 하지만 불과 2~3년 사이 웨딩사업과 게임장 운영에 실패, 100억 원대 손해를 보며 사업가로서의 한계를 드러냈다. 2005년 사기혐의로 구속, 과거의 명성까지 한순간에 잃어버린 그는 스포츠스타들의 은퇴 뒤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다.
“인기에 취할 수 있는 스포츠세계와 냉혹한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
프로야구무대에서 은퇴한 뒤 골프용품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불사조’ 박철순(52) 알룩스포츠 대표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같이 말했다.
수십 년간 운동만 했던 선수가 은퇴 뒤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세상물정을 잘 몰라 돈을 노리고 접근하는 사기꾼들의 유혹도 많다.
순진한 운동선수는 좋은 ‘먹잇감’
믿었던 사람에게 속아 돈을 날리는 건 가장 흔한 경우다. 자유계약(FA) 대박을 터트린 한 프로야구선수는 빚보증을 섰다 차비걱정까지 해야 하는 빈털털이가 됐다. 1990년대를 풍미한 또 다른 야구스타도 같은 경우다. 그는 지도자로 변신한 최근까지 월급을 압류당하며 힘겹게 살고 있다. 몇 년 전 계약금과 연봉으로 엄청난 수익을 챙긴 스타급 투수도 지인의 사업에 투자했다 수억 원을 날린 것으로 알려졌다.
전 복싱챔피언은 부인에게 뒤통수를 맞은 사실로 유명하다. 그의 부인은 남편이 대전료로 벌어들인 전 재산을 빼돌려 달아났다. 그는 재기는 엄두도 못낸 채 매일을 술로 보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권투선수 역시 벌리는 사업마다 사기를 당해 벌어놓은 돈을 다 까먹고 조그만 장사를 하며 힘겹게 살고 있다.
프로야구 롯데자이언츠 소속으로 엄청난 강속구를 자랑했던 고 박동희 씨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경우다. 은퇴 뒤 술집을 하다 운영이 여의치 않던 그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졌다. ‘철완 너구리’로 유명했던 장명부 씨 역시 일본으로 건너가 마작하우스를 운영하다 과로로 숨져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어설픈 기질이 실패 불러
천하장사를 지낸 유명 씨름선수는 수년 전 영상처리업체를 세워 사업가로 변신, 화제가 됐다. 컴퓨터에 저장된 사진파일을 스탬프(도장)로 만들어주는 특이한 아이템으로 승부수를 걸었던 것. 그러나 회사는 직원들 월급조차 주기 힘들 정도로 기울어버렸다. 사업을 소개한 지인 말만 믿고 투자가치를 지나치게 낙관한 탓이었다.
농구계도 무너진 왕년의 스타들이 즐비하다. 농구대잔치시절 명문 팀 스타플레이어로 뛴 모 선수는 은퇴 뒤 소속구단 자회사 사무직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직장생활이 몸에 익지 않아 수 천만 원 빚을 지고 한 때 자살기도까지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유능한 지도자출신 농구계인사는 고급식당을 운영하다 실패, 얼마못가 문을 닫았다.
한번 실패하면 재기 힘들다
20년 이상 선·후배규율이 엄격한 단체생활에 익숙한 운동선수들은 일반 사회초년생과 다르다. 훈련과 경기 등 짜인 일정에 따라 움직인 그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치면 일반인보다 크게 당황한다. 또 쉽게 사람을 믿어 투자전망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품는 것도 문제다.
무엇보다 한번이라도 실패를 겪으면 쉽게 좌절하고 포기해버리는 경향도 강하다.
체육계 일각에선 해당 팀과 종목차원에서 선수들에게 은퇴 뒤를 위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개인의 삶이 망가지는 것을 넘어 애꿎은 목숨까지 앗아간 이호성 사건은 이 같은 은퇴선수들의 고단한 ‘인생 2막’의 가장 비극적인 사례가 돼버렸다. ‘제2의 이호성’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는 스포츠현장의 쓴 소리는 그냥 흘려들어선 안될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