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탓만 하다 고개숙인 축구
2007-08-02 남장현
11m의 잔인한 룰렛. 두 번의 행운은 없었다. 김정우가 찬 볼이 오른쪽 골대를 맞고 옆으로 빗나간 순간, 모두가 장탄식을 터뜨렸다. 이와 함께 47년만의 아시아 정상을 향한 꿈도 모두 산산조각났다. 베어벡호가 무너졌다. 난적 이란을 승부차기로 누르고, 07 아시안컵 4강에 오른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비교적 쉬운 상대로 꼽힌 이라크에 승부차기 끝에 덜미를 잡혀 결승행이 좌절됐다. 역시 이라크에 져 준결승에서 탈락한 작년 도하 아시안게임의 악몽이 다시금 재현된 7월25일 콸라룸푸르의 마지막 밤. 장밋빛 희망을 품고, 화려한 아시안컵 장도에 올랐던 한국 축구는 또다시 좌절과 비통함을 반복해야 했다.
베어벡 나 홀로 스토리
무리한 요구였을까.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했던 한국 대표팀이 끝내 일본과의 3, 4위전으로 밀려나자 예상대로 언론의 비판과 지적이 쏟아졌다.
부임 이후 늘 지적된 베어벡 감독의 ‘무색무취’ 전술과 단조로운 패턴, 의문스런 선수기용 등 단골 메뉴들이 또다시 언론 지면을 장식했다.
매 경기 달라지고, 특정 순간에 집착하는 언론의 지적은 지나친 감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거의 납득할만한 내용과 핵심을 짚어냈기에 공감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 베어벡 감독은 이런 지적과 비판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들은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변명만 잔뜩 늘어놓을 뿐이었다.
이라크전이 끝난 뒤 베어벡 감독은 ‘많은 팬들이 대표팀의 경기력과 내용에 실망했다’는 내용의 질문을 받자 “정말 내용이 안좋았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며 “그들은 국제 축구가 어떤지 성찰해야 한다”고 팬들의 수준을 의심하는 답변을 했다.
뿐만 아니라 이라크전 전날에도 ‘측면만 너무 고집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에 “한국 언론은 02년에는 포백과 스리백을 놓고 입씨름을 벌이더니 이번엔 스리톱과 투톱을 놓고 화두를 던진다”고 비꼬았다.
그러나 결과는 어땠는가. 쉬울 것으로 전망된 조별예선도 사우디의 도움을 받아 턱걸이로 통과하고, 8강전과 4강전은 한골도 넣지 못한 채 아예 승부차기까지 벌이는 등 시종 ‘살얼음판’ 행보를 거듭한 베어벡호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뜻을 관철하려는 고집도 좋지만 문제가 있으면 바꿔야 하고, 수정도 고려하는 게
사령탑의 임무다.
작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예선전을 준비하며 “(리그)일정이 멍청하다”는 등 K리그 감독과 유독 마찰이 심했던 베어벡 감독은 이번 아시안컵에선 그 화살을 언론과 팬들에게 돌려 빈축을 샀다.
이동국 폭탄발언
4강전 탈락을 그저 감독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문제는 선수들에게도 있다. 베어벡 감독은 여론의 포화를 의식한듯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감쌌으나 대회기간 내내 무기력한 플레이로 일관한 선수들을 무작정 옹호하긴 어렵다.
부상으로 인한 유럽파의 불참으로 세대교체에 놓인 어린 선수들이 주축이 됐고, 포백수비가 완성도에 접어들었으나 일본과의 3, 4위전을 제외한 초반 5경기서 고작 3골밖에 넣지 못했다는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갈 과제로 남았다.
또한 아시안컵 실패에 한몫했다는 고온다습한 기후, 수준이하의 경기장 및 연습 시설은 홈팀 4개국을 제외한 대회 참가 12개국 모두에 해당됐다. 한국과 일본을 나란히 꺾고, 보란 듯 결승에 진출한 이라크나 사우디 등도 똑같은 조건이었기에 변명거리가 되지 않는다.
한편 찜찜한 얘기도 있다. 항간에선 대표팀에서 얼마간 내분이 있었다는 후문도 들려온다. 출전기회를 많이 잡지 못한 이동국이 7월15일 바레인과의 예선 2차전을 마친 뒤 “감독의 전술을 이해할 수 없다”라는 폭탄발언을 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02월드컵을 앞둔 시점에서 갑자기 불거진 ‘최용수 항명사태’와 버금할만한 대단히 큰 사안이었다.
이에 베어벡 감독이 “네 자신을 돌아보라”며 응수해 사태가 커지자 이동국은 다음날 훈련 인터뷰에서 “내 말이 확대됐다”고 답했고, 베어벡 감독도 “서로 알게된 지 6년이다.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로 서둘러 진화에 나섰으나 교체투입을 놓고 벌어지는 이들의 미묘한 신경전은 노련한 고참이 부족한 대표팀 전체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란전을 앞두고 중동발 외신을 통해 보도된 고트비 코치의 이란 프로팀 감독 내정설도 어린 선수들에게 큰 혼란과 혼선을 야기했다.
만일 홍명보 코치의 카리스마와 백전노장 이운재의 노회한 선수 장악력이 아니었다면 대표팀은 4강 진출도 장담키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교체도, 유임도 못해~’ 당혹스런 축구협회
사면초가에 놓인 축구협회다. 아시안컵 우승이 결국 실패로 끝나며 ‘사령탑을 교체하라’는 팬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협회는 베어벡 감독을 내치기도, 또 유임키도 어려운 상황에서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공식임기가 08년 8월에 끝나는 베어벡 감독은 국가대표팀뿐 아니라 올림픽대표팀도 이끌고 있어 이대로 물러날 경우, 당장 8월22일 시작될 아시아 최종예선에도 파장이 미치게 된다.
이라크전을 마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베어벡 감독은 ‘지휘봉을 계속 잡을 것인가’란 물음에 “향후 거취는 이미 마음에 결정했다. 아직은 밝힐 단계가 아니다. 앞으로 많은 분들이 고민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사퇴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고, 그렇다고 계속 지휘봉을 잡겠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어려운 모호한 답변이 아닐 수 없다.
그저 현재로선 사령탑에서 물러나더라도 잔여연봉을 받을 수 없는 자진사퇴가 아닌, 협회의 처분을 기다리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