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날 때부터 ‘벤츠’ 타고다녀 …지금은 맨발

2005-05-17      
조성민(32)이 돌아왔다. 조성민은 지난 5일 한화 이글스와 전격적으로 입단 계약을 했다. 그가 유니폼을 입은 것은 2002년 이후 3년 만이다. 모든 사람들이, 조성민 스스로도 야구인생이 끝났다고 여겼을 때 그는 다시 일어섰다. 조성민은 연봉 5,000만원짜리 신고선수 신분이다. 구단으로부터 지명을 받지 못해 연습생과 다름없는 대우로 한화에 입단했다. 그러나 야구를 할 수 있다는 행복감으로 그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때의 웃음과는 조금은 달랐다.조성민은 여전히 최고의 뉴스메이커였다. 한화 입단 발표 이후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 조성민이 확고하게 밝힌 원칙이 있다. 연예부 기자나, TV 연예 프로그램의 인터뷰 요청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더이상 ‘최진실의 남편’으로 비춰지기 싫은 것이다.조성민은 “최진실씨에 대한 질문은 절대 받지 않겠다. 이제 그라운드로 돌아왔으니 야구 선수 조성민으로만 봐달라”고 부탁했다. 아울러 ‘야구선수’ 조성민에게 묻는 질문은 무엇이든 대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얼마나 아픈 과거를 떨치고 싶은지, 얼마나 야구를 하고 싶어했는지 짐작 가는 대목이다.조성민은 그만큼 커다란 상처를 가지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벤츠를 타고 다녔지만 지금은 맨발로 뛰는 까닭이다. 조성민은 신일고 시절부터 비단 위를 걸었다. 임선동(현 현대 유니콘스)과 함께 초고교급 선수로 이름을 날리다가 고려대에 입학해 전국구 스타가 됐다. 조성민은 한 수 아래로 여겼던 박찬호(현 텍사스 레인저스)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것에 자극받아 96년 일본 최고의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조성민은 일본에서 ‘한류’의 선구자와도 같았다. 194cm의 키에 조각같이 잘 깎아놓은 얼굴, 서글서글한 미소에 사내다운 성품은 일본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성민은 98년 1군에 진입, 단번에 요미우리를 대표하는 투수로 성장했다.조성민은 99년 일본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영광을 누렸지만 치명적인 팔꿈치 부상을 입는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여전히 화려했다. 요미우리가 그의 재활을 위해 모든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2000년 12월 톱탤런트 최진실과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행복할 줄만 알았던 그들의 결혼생활이 어긋나면서 추락은 시작됐다. 조성민과 최진실 커플은 떠들썩한 불화 끝에 결국 2002년 말 이혼했다. 조성민은 비슷한 시기에 요미우리에서 자진 퇴단했다.조성민은 이혼 후에도 가정 문제로 끊임없이 입방아에 올랐다. 야구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최진실의 남편’이라는 세간의 시선은 그에게 굴레와도 같았다.

그전부터 해오던 제과사업까지 뜻대로 되지 않자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친구집에서 숙식을 해결할 만큼 초라해졌다.조성민은 2003년 자존심을 접고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를 신청했다. 국내 구단으로부터 지명을 받지 못하자 지난해에는 신인 2차지명에 도전했다. 그러나 프로구단은 그에게 2차 지명권조차 행사하지 않았다. 재기여부가 불투명할 뿐만 아니라 그의 복잡한 사생활이 걸림돌이었다. 조성민에게 ‘최진실의 남편’이라는 짐은 그만큼 무거웠다. 조성민은 마지막 미련까지 버리고 올해 MBC ESPN의 야구 해설가로 변신했다. 한달 정도 지나고 그의 해설이 익숙해질 때 그는 느닷없이 한화와 계약했다.

해설가에서 선수로 복귀한 것은 미국·일본에서도 전례없는 사건이었다.한화 김인식 감독은 “지명을 받지 못해도 야구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신고선수로 들어오면 올해 말이나 내년부터는 뛸 수 있다”고 조성민을 설득했다. 그의 가슴 한켠에 묻어뒀던 뜨거운 불씨가 살아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조성민은 두말없이 “야구를 하겠다”고 나섰다. 양복과 구두를 벗어던지고 유니폼과 스파이크를 다시 신은 조성민은 “모든 것을 잊고 새 인생을 출발하겠다”고 다짐했다. 특히 대중에게 ‘최진실의 남편’으로서 다시 부각되는 것을 몹시 경계하고 있다.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에 선 그가 가슴에 담고 있는 것은 야구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