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인생의 마지막 승부다”
2007-04-19 남장현
흔히 육상을 ‘배고픈 종목’이라고 말한다. 언제나 축구와 야구 등 프로 스포츠의 위세에 눌려 설 자리를 잃고, 비인기 종목의 한계에 부딪혀왔기 때문이다.
인재 육성을 위한 시설 및 풀뿌리 인프라도, 재정적 지원도 넉넉하지 못해 미래 한국 육상을 이끌 어린 선수들이 희망을 잃고 중도에 꿈을 접는 경우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얼마전 대구가 2011 세계 육상선수권 대회를 유치하는데 성공했지만 ‘육상=가난’이란 인식을 불식시키는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중국에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생활고로 인해 자신의 메달을 팔아 연명한다는 가슴 아린 소식이 들려올 정도다.
하지만 이런 세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뛰는 선수가 있으니 바로 국민 마라토너 ‘봉달이’ 이봉주(37·삼성전자). 그는 지난 3월18일 서울서 열린 동아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란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자신의 올림픽 무대 4번째 도전을 앞둔 이봉주. 마라톤 인생의 마지막 꽃을 피우기 위한 그의 새로운 도전이 다시 시작됐다.
공주서 새 출발
가슴이 쿵쾅쿵쾅 울린다. 봉달이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최근 종영된 모 방송국 인기 드라마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손기정-황영조’ 계보를 잇는 한국 최고의 마라토너 이봉주 스토리다.
사랑하는 부인, 금쪽같은 두 아들과 함께 했던 근 열흘의 달콤한 휴식을 마친 이봉주는 지난 9일 충남 공주에서 시작된 소속팀 훈련에 참가, 자신
이 세운 마지막 목표인 08 베이징 올림픽 월계관을 향해 스파이크화 끈을 다시 조여맸다. 지겹고 힘들 법도 한데 이봉주 본인은 “마라톤화를 신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이 남자, 보통이 아니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극한 인내와 엄청난 체력을 요구하는 42.195km의 처절한 레이스 마라톤. 순위권 확보를 위해선 100m거리를 19초 이내에 주파하는 속도를 유지하며 2시간여 동안 달려야 하는 종목이다. TV중계를 보면 여유있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주위 가로수들이 쏜살같이 지나갈 정도로 대단히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선수들이 레이스 도중 고통스런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봉주는 이를 벌써 35회나 완주했다. 중도 포기는 단지 2회에 그쳤을 뿐이었다. 우승을 떠나 이런 단순 수치상 기록만 봐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를 증명해준다.
선수단을 지도하고 있는 오인환 감독은 “30대 후반까지 이정도 체력과 몸관리를 유지하는 선수는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물다”고 말한다. 정말 믿음직스럽다.
서울 국제마라톤 우승의 아쉬움
지난 3월 서울 국제 마라톤은 이봉주에게 참으로 의미가 많은 대회였다. 그가 우승할 것이라 점치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언론은 37세의 그에게 ‘환갑 마라토너’란 달갑잖은 닉네임을 붙여주며 “중도에 포기하지만 않으면 성공한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이봉주는 2시간8분04초의 기록으로 보무도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오히려 자신이 세웠던 한국 최고기록 2시간7분20초의 성적을 갱신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 정도였다.
이봉주의 지도를 맡고 있는 오인환 감독은 한국 신기록이 나오지 못한 이유로 페이스메이커가 모두 빠진 30km대 구간 기록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오 감독은 “마라톤에서는 5km마다 부분 시간을 끊는데 이날 경기에서 이봉주의 30~35㎞구간 랩타입이 15분57초였다. 35~40㎞구간의 랩타임이 14분58초였으니 30km대에서 15분 이내로만 묶었다면 충분히 신기록도 가능했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역사와 마찬가지로 스포츠에선 ‘가정법’이 존재할 수 없지만 결국 페이스메이커가 좀 더 역할을 해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또 레이스 구간의 성향도 무시할 수 없다. 광화문-잠실 구간은 무난하면서도 선수들이 제 기량을 발휘하기 정말 어려운 코스였다. 특히 한강 대교를 건널 때 부는 강바람은 정상적인 레이스를 방해하는 치명적 요소로 작용했다. 이봉주의 스피드가 떨어졌던 30km대 구간도 바로 이곳이었다.
나이는 묻지마
이봉주는 이번 대회를 통해 한가지 과제를 찾았다. 바로 스피드 보강이다. 예나 지금이나 체력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기록 단축의 필수 요건인 ‘스피드’에서 뒤처진다는 것을 느꼈다. 이에 따라 내년 베이징 올림픽을 기준으로 삼고, 남은 기간 부지런히 훈련을 소화해 스피드를 최대한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마스터 플랜 작성도 끝났다. 일단 이봉주는 올림픽이 열리는 시기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늦여름이란 점을 감안, 올 9월께 1차례 풀코스 구간 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다. 이보다 앞선 5, 6월경에는 일본에서 열리는 대회에 나서 5km 단축 코스를 돈다는 생각이다. 이후 겨울 동계훈련을 끝내고, 내년 초 한차례 풀코스를 뛰고, 올림픽에 출전한다는 것. 아직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회의 최종 승인이 나지 않았지만 국가당 3명씩 출전하는 올림픽 대회에 이봉주가 나서는 것은 큰 무리가 없을 전망이다.
올림픽 무대 통산 4번째 도전. 이봉주는 남아공 투과니에 3초 뒤진 2시간12분39초의 기록으로 아쉽게 은메달에 그친 96년 애틀랜타에서의 아쉬움을 털어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월계관을 쓴다는 각오다. 모 CF를 보면 이런 코멘트가 흘러나온다.
“나이가 많다고? 그냥 경험이 많다고 해두지….”
마라톤 인생의 종착점을 향해 달리는 이봉주의 도전은 어떻게 이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