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날은 가고 아픈 가슴만 남았다

2007-06-07     남장현 
삼성 라이온즈 역대 스타 근황

“내 몸에서 흐르는 피는 아마 파란색일 겁니다. 대구는 영원한 고향이죠.” 광고 CF에서나 들을 법한 말이다. 한국 프로야구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삼성 라이온즈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는데 이보다 적합한 말은 없을 듯하다. 이만수 장효조 김시진 김일융 박충식 이선희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삼성라이온스의 간판급 스타로 군림하며 한국 프로야구사(史)에 한 획을 그었던 스타들이라는 점과 또 하나는 친정으로부터 ‘팽’당했다는 점이다. 삼성 구단은 파란 피가 흐르는 이들이 하향곡선을 그리며 부진의 늪에 빠지자 가차 없이 ‘팽’을 단행했다. 한때 밀림을 호령했지만 늘그막에 무리에서 쫓겨나 쓸쓸한 노년을 보내는 사자신세가 바로 이들의 처지와 다름 아닌 것이다. 한때 ‘삼성구단의 남자들’이었던 이들 6인방의 근황과 심경을 밀착 취재해 보았다.



◆ 김시진-이만수, ‘살길은

찾았지만 가슴 쓰리다’

“나도 트레이드를 당해 본 사람이다.”

김시진 현대 유니콘즈 감독(49)이 최근 한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밝힌 뼈있는 한 마디다. 여기에는 서글픈 사연이 있다. 83년 입단한 이후 삼성 최고 에이스로 활약하던 88년 11월, 김 감독은 롯데 최동원과 트레이드됐다는 통보를 접했다. 최동원과는 같은해 프로에 들어와 자웅을 겨뤄왔던 터였기 때문에 그 배신감은 뼈와 살을 저미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고 모든 것들을 기억 저편으로 보냈다.

김 감독은 “큰 경기에 유독 약하다는 이미지가 구단 결정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한다. 92년 롯데에서 은퇴할 때까지 김 감독은 통산 124승(73패, 16세이브)을 달성했다.

여기에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김 감독의 사령탑 부임 첫 해인 올 시즌, 현대는 삼성을 상대로 최근까지 6승2패로 압도한다. 이는 마치 자신을 내친 친정팀에 한풀이를 하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지난 5월26일 팬티 바람으로 만원 홈관중 앞에서 주루해 화제를 몰고 온 ‘헐크’ 이만수 SK 수석코치(49)도 삼성과 아픈 관계다. 프로 원년인 82년 입단해 97년 은퇴할 때까지 16시즌간 1449경기에 출전, 통산 타율 0.296에 861타점, 625득점, 1276안타, 252홈런을 기록했다. 이 코치는 대구 홈경기 9회말 투아웃 상황을 항상 기억한다. 당시 팬들은 “이만수”를 외쳤고, 마무리는 언제고 그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만수는 노장이란 이유로 떼밀리듯 은퇴했고, 구단 지원없이 자비로 미국 코치 연수를 떠나야 했다. 시카고를 거쳐 작년 10월 국내로 복귀했지만 삼성은 끝내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보도도 있었지만 이 코치는 아예 삼성과 접촉조차 없었다고 했다. 결국 안착한 곳이 SK와이번스. 삼성팬 상당수가 SK로 마음을 돌렸다는 얘기도 있다. 최근 이 코치는 경기를 위해 10년만에 대구를 방문했다. 친정 팬들에게 사인을 하고, 손을 흔들었지만 뭔가 2% 부족했다.

이날 “모든 열정을 바친 대구는 영원한 내 고향”이라고 말한 이 코치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눈을 감았다. 정말 자신을 홀대한 삼성에 대한 서운함이나 앙금이 다 사라졌을까.


◆ 장효조-이선희, ‘삼성에

남았지만 아픔은 있다’

‘타격왕’ 장효조(50)는 그나마 나은 케이스다. 적어도 삼성 유니폼을 입고 있으니 말이다.

현재 삼성 스카우트로 활동중인 장효조는 83년부터 92년까지 10년간 현역으로 뛰었다. 통산 타율은 0.331, 출루율 5년 연속 1위에 등극했을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여기에 8연타석 안타와 3연속 홈런 기록도 있으니 부연이 필요없다. 87년에는 최우수 선수로 등극했다. 그러나 삼성은 장효조를 끝까지 지켜주지 않았다. 그는 88년 12월 롯데 김용철과 맞교환됐다. 언제나처럼 위기관리와 큰 경기 징크스가 이유였지만 설득력이 없었다.

“지금은 웃어도 너무 서운했다”고 당시를 회상한 장 스카우터는 “6년간 홈런을 48개 밖에 치지 못해 그런가”라고 되묻는다.

명성이나 족적에 비해 조금 빈약(?)해 보이는 스카우터로 활동하는 것도 미스터리다. 본인은 “선수 선발 작업은 야구에 있어 대단히 매력적인 일”이라고 거듭 강조하지만 팬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찜찜함 속에 푸른 유니폼을 입고 있는 또 한명이 있다. 삼성의 2군 코치로 활동중인 이선희(52)다. 현역 시절, 이 코치는 당대 최고의 좌완임과 동시에 70년대 아마야구계 ‘일본 킬러’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82년 역사적인 두 번의 만루홈런을 허용하는 아픔을 겪었다. MBC청룡과 개막전에서 7-7 동점 상황에서 4점포를 얻어맞았고, 페넌트레이스 15승7패를 기록한 뒤 만난 OB와 한국시리즈 최종전에서도 만루포 한방으로 팀 우승을 날려버렸다. 매정한 삼성은 부진한 이선희를 그대로 두지 않았고, 결국 85년 MBC청룡 중견수 이해창과 맞트레이드했다.

MBC에서의 적응은 쉽지 않았다. 88년 은퇴해 빙그레에서 지도자로서 첫 발을 내디딘 이 코치. 프로 6년만에 마운드를 떠나야 했던 속내를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구단은 잘못 없어요. 제가 못하는데 어떡합니까. 트레이드는 당연하죠.” 믿거나 말거나다.


◆ 박충식-김일융, ‘근황조차

접하기 어려워’

어쩌면 파란 유니폼을 입은 스타중 가장 불운한 선수일지 모른다. 국내에도 없어 더욱 궁금하고, 마음을 아리게 한다. 역시 에이스로 명성을 떨친 박충식(38) 얘기다.

환상의 사이드암으로 기억되는 박충식은 프로야구 ‘조로(早老)’의 대명사로 회자된다. 93년 삼성에 입단한 박충식은 14승7패(2세이브)의 성적을 올리며 루키 대열에 합류했지만 해태와 한국시리즈 3차전부터 꼬였다. 당시 국보급 투수 선동렬과 정면대결하며 15회까지 181구를 던진 박충식은 94년 203.1이닝을 소화 하며
14승을 올렸는데 그 중 10승을 완투했다.

당연히 롱런은 불가능했다. 95년부터 선발과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무리하게 등판한 박충식은 팔꿈치와 어깨에 이상이 온 상태에서 성적을 내지 못하다 98년 해태로 이적했고, 긴 재활에 지쳐 결국 02년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호주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유소년들을 가르치던 박충식은 최근 사업에 어려움을 겪으며 귀국을 고려중인 것으로 알려질 뿐, 자세한 근황은 파악하기 어렵다.

박충식의 한 지인은 “입국 소문도 있는데 확실치 않다”며 “그토록 죽어라 뛰었는데 삼성에서 제대로 치료도 해주지 않고 나몰라라 하는 모습이 영 불만스럽다”고 말했다. 당연하다.

한편 일본에서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다 올 3월 LG의 투수 인스트럭트로 잠시 인연을 맺은 ‘황금박쥐’ 김일융 얘기도 조금 비극적이다.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68~83년)하며 80승72패(36세이브)에 방어율3.16을 기록한 뒤 84년 고국 무대를 밟은 김일융. 그는 한국서 뛰던 3시즌 동안 모든 것을 보여줬다.

첫 해 동료 김시진과 환상의 원투펀치를 이루며 승승장구한 김일융은 16승을 거둔 뒤 한국시리즈에서 3승을 챙겼고, 85년에도 무려 25승을 달성해 모든 이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말년은 쓸쓸했다. 13승을 올렸으나 지병인 당뇨와 우울증으로 인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삼성은 물론 고국과의 인연도 사실상 이게 끝이었다.

물론 김일융의 도일(渡日)이 반드시 구단만의 잘못은 아니지만 야구인들은 “삼성이 그의 몸을 좀 더 아꼈다면, 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다면 더 오래 뛸 수도 있었다”고 아쉬워한다. 씁쓸한 삼성과의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