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르던 4년 물거품… ‘아! 평창’
2007-07-12 남장현
‘꿈★은 이뤄지지 않았고, 좌절과 회한만이 남았다.’
제119차 IOC총회가 열린 과테말라시티 레알 인터콘티넨탈 호텔. 7월5일 오전(한국시간) 자크 로게 IOC위원장의 입에서 “소~치”란 말이 흘러나온 순간, TV 앞에 모여앉아 발표를 기다리던 온 국민은 귀를 의심해야 했다. 꼭 4년만에 되풀이된 악몽. 2014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 투표에서 평창은 결국 소치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4년전 체코 프라하에서 있은 제115차 IOC총회에서 캐나다 벤쿠버에 2010년 대회 개최권을 내줬던 평창과 체육계는 ‘닮은 꼴 역전패’에 몸서리를 쳤다. 소치의 물량 공세와 유럽의 표몰이, 노무현 대통령 등 평창 유치위의 소극적인 행보가 패인이었다는 분석이다. 믿고 싶지 않은 악몽. 과테말라시티는 희망이 아닌 좌절의 땅이었다.
‘쩐의 전쟁’의 승자는 소치
과연 현대판 ‘쩐의 전쟁’이었다. 2014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놓고 러시아 소치,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와 경합한 평창은 1차 투표에서 최고 득표를 얻었음에도 소치의 물량 공세에 밀려 역전패의 아픔을 되풀이했다. 51대47, 단 4표차였다.
IOC위원 95명이 참가한 1차 투표에서 36표를 얻은 평창은 소치를 2표차로 누르고 우위를 점했으나 결선에 오르지 못한 오스트리아와 독일 국적(독일 일부 지역도 예정지)의 위원 3명이 추가돼 98명이 참가한 2차 투표에서 끝내 주저앉고 말았다.
국제 스포츠 무대에 영향력을 과시하고픈 신흥 부호들이 즐비한 러시아답게 소치는 IOC총회전부터 강력한 공세로 평창을 긴장시켰다. 소치는 유치단 인력을 무려 1000명 넘게 투입했고, 전세기만 모두 9대를 동원했다.
하이라이트는 미니 아이스링크 설치. 푸틴 대통령과 국영 기업 가즈프롬을 앞세운 소치는 IOC의 경고를 감수하면서까지 웨스틴 카미노 호텔에 본국서 긴급 수송한 아이스링크를 설치해 위원들과 외신들의 관심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프레젠테이션 준비도 철저해 미국 할리우드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감수를 받는 등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AFP와 로이터 등 외신들은 소치가 약 6000만유로(750억원)를 투입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약 4000만유로를 들인 평창의 1.5배에 달하는 규모.
하지만 뭔가 찜찜했다. 소치는 완벽한 계획을 세운 평창과는 달리 지난 2월 IOC실사단이 방문했을 때에도 부지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준비가 미흡했었다. 그럼에도 투표 당일엔 푸틴이 과테말라를 출국하는 등 지나친 자신감을 보였다. 또 러시아와 돈독한 관계인 사마란치 전 IOC위원장이 위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당혹스런 루머도 나왔다.
엄격한 IOC 윤리규정으로 위원들을 겨냥한 ‘향응’과 ‘뒷거래’는 사라졌으나 특정 인사를 동원하며 막강 로비력을 과시한 소치의 ‘검은 커넥션’까지는 막을 수 없었던 평창이었다.
러시아 외교력의 승리?
어쩌면 결과론일 수도 있겠다. 평창 유치위는 4년전 프라하의 악몽을 재현하지 않기 위해 겸손한 자세로 IOC위원들의 표심을 공략하는 방식을 택했다. 소치처럼 떠들썩한 행보를 하다가는 오히려 위원들의 반감을 살 수 있다는 우려 탓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평창은 환경 파괴란 치명적 약점을 지닌 소치에 정면 대응하는 대신, 감성에 호소하는 막판 프레젠테이션에 전력을 쏟느라 IOC 위원들에게 충분히 홍보를 하지 못했고, 이는 2차 투표에서 기존 표마저 잃는 사태를 빚었다.
소치는 탈락한 잘츠부르크가 1차 투표서 얻은 25표와 추가된 3표중, 17표를 휩쓴 반면 평창은 11표를 추가하는데 그쳤다. 김운용 전IOC위원장이 오랫동안 공을 들여 우리의 텃밭처럼 여겨진 아프리카와 중남미는 물론 아시아의 표까지 내줬다는 평가다.
김정길 KOC(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도 “물량 공세에 텃밭을 지키지 못한 게 패인”이라고 실패 원인을 분석했다.
막강한 러시아의 외교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딱딱한 이미지로 정평이 난 푸틴의 행보가 평창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예상은 처음부터 어긋났다. 오히려 IOC위원들이 총회 리셉션에 참석한 푸틴과 악수하기 위해 줄을 서는 상황이 연출됐다. 이는 노 대통령이 위원들의 자리를 직접 찾은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러시아가 전통의 동계스포츠 강국이란 점도 소치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소치는 올림픽에서 총 293개의 메달을 획득한 사실을 강조, 쇼트트랙에 치우친 우리(평창)의 현실을 지적했다.
또 동계스포츠 강국임에도 그간 한차례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지 못했던 점을 상기시키며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약속, IOC위원들의 마음을 살 수 있었다.
결국 총회 직전까지 상대 도시에 비해 앞선다는 평가를 받아온 평창은 막판 변수에 휘말려 ‘다된 밥에 재뿌린 사태’를 다시금 경험한 셈이다.
#또 물먹은 평창과 체육계
2014 동계 올림픽 유치에 실패, 8년의 준비가 모두 물거품이 된 평창과 체육계의 고통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평창은 당초 올림픽에 대비, 강원도 각 지역 도로와 리조트, 경기장 등 인프라 건설을 계획했으나 이번 실패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은데다 막대한 경제적 파급 효과를 기대할 수 없게 됐다.
또 체육계가 받은 충격도 만만찮다. 2010년에 이어 2014년 대회마저 실패한 한국 스포츠 외교력에 대한 의구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고, 대회 개최를 계기로 동계스포츠 활성화와 저변 확대라는 오랜 숙원이 날아간 이유에서다.
좌절된 기나긴 꿈과 도전. 아무 기약없는 4년은 평창에나, 체육계에나 고통스러운 과정의 반복이다. 모든 것을 극복하고, 2018년 대회 개최를 목표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수 있을지 추이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