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제2차 한일협약 체결
2004-11-19 공문룡 칼럼니스트
노씨는 자신이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모은 비자금 총액이 5,000억원이라고 실토했다. 노씨는 이어 이중 당시까지 갖고 있던 비자금 잔액은 1,700억원 가량이라고 밝혔다. 검찰이 95년 12월5일 노씨를 재판에 회부하면서 밝힌 노씨의 비자금 조성액수는 4,500억~4,600억원. 노씨가 스스로 밝힌 비자금 총액보다 약간 줄어든 금액이다. 그러나 노씨가 주장한 비자금 잔액과 검찰이 수사결과 발표한 액수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검찰이 노씨를 기소하면서 발표한 비자금 잔액은 위장매입한 부동산을 포함, 2,300억원 가량. 노씨가 주장한 금액보다 무려 600억원 가량이 많다. 게다가 금융기관에 예치한 예금과 대우, 쌍용, 한보그룹에 빌려준 대여금의 이자까지 포함할 경우 노씨의 비자금 보유액은 2,700억원에 달한다. 노씨의 주장과는 달리 1,000억원 상당의 금융자산 및 부동산이 추가로 은닉돼 있었던 것이다. 결국 노씨는 자신이 알았든 몰랐든 국민에게 사과성명을 발표하는 순간까지도 진실을 털어놓지 않은 셈이다.
1905년 11월 17일 "제 2차 한일협약 체결"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공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이며, 제2차 한일협약, 을사보호조약, 을사5조약이라고도 한다.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가쓰라[桂太郞]-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으며,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조약(英日同盟條約)을 통해 영국으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지도 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같은 해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러시아로부터도 마침내 한국에 대한 지도·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승인받았다. 열강들로부터 한국의 보호국화(保護國化)에 대한 승인을 얻어낸 일제는 이어서 한국에 보호조약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정지작업을 거쳐 일제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1987년 11월 19일 "삼성그룹 회장 이병철 별세"
호 호암(湖巖). 경상남도 의령(宜寧) 출생. 중동중학을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대학교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하였다가 1934년 중퇴하였다.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세워 사업에 투신한 후, 1938년 3월 자본금 3만 원으로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를 설립하였다.1951년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세워 무역업을 하면서 1953∼1954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사업 영역을 크게 확대해갔으며, 1961년 한국경제인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964년 동양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과 1965년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언론사 경영에 참여하였다. 1969년 삼성전자를 설립하여 삼성그룹 육성의 도약대를 만들었다. 1974년 삼성석유화학·삼성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공업에 진출하였고, 이후 용인자연농원·삼성정밀 등을 설립하였다. 1982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하였다. 이 밖에도 문화재단·장학회 등을 설립하였고, 백화점·호텔 등의 경영에도 참가해, 사업의 다각화를 통하여 국가경제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2000년 11월 20일 "영종대교 개통"
총길이 4,420m, 교량너비 35m, 주탑높이 107m, 교각 수 49개로,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구간 중 인천광역시 서구 경서동(장도)과 중구 운북동(영종도)을 연결하는 황해 횡단 다리이다.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의 중추 공항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인천국제공항이 영종도에 건설됨에 따라 영종도와 인천광역시 육지부를 연결하기 위하여 1993년 12월에 착공하여 2000년 11월에 완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