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도산 안창호 선생 옥중서 별세

2004-03-17     공문룡 칼럼니스트
1995년 3월 9일 <한반도에너지 개발기구(KEDO) 발족>
북한의 경수로 설치 관련 기구로 국제적 컨소시엄의 형태를 띤 KEDO가 지난 95년 3월 9일 발족됐다. 즉 KEDO는 북한이 흑연감속형 원자로 2기를 동결하는 대가로 미국이 제공하기로 한 1,000MW급 경수로 2기를 건설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 컨소시엄인 셈이다.가입국가는 한·미·일 3국의 집행위원회 중심으로 운영되며 그 외 영국, 캐나다 등의 일반회원국으로 구성된다. KEDO는 지난 94년 제네바에서 체결된 미국과 북한과의 합의문 이행과 북한에 대한 한국 표준형 경수로 지원 및 자금조달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됐으며, 2001년 함경남도 신포·금호지구에 2008년 완공 예정으로 경수로 건설공사가 시작됐다. 경수형 원자로(경수로) 제공 목적 외에도 경수로 1호기 완성 때까지 매년 대체 에너지로 중유(HFO:Heavy Fuel Oil) 50만t을 제공하는 등 대체 에너지 제공과 폐연료봉 처리·기존 핵시설 해체 등을 활동 목표로 하고 있다. 이 기구는 경수로 제공이 끝나면 즉시 해체된다. 본부는 미국 뉴욕에 있다.

1938년 3월 10일 <도산 안창호 옥중에서 별세>
민족개조론을 주장한 항일독립투사로 흥사단 설립자인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38년 3월 10일 옥중에서 사망했다.한국 근대사에서 위대한 인물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안창호 선생은 우리나라 근대 민족운동의 큰 지도자이며 또 뛰어난 민족주의 사상가였다. 선생은 생전에 우리 민족이 일제의 침략과 지배아래 고통받고 있을 때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고 또 독립을 되찾기 위한 구국독립운동에 앞장섰다.19세에 독립협회에 가입한 안창호 선생은 독립협회 판서지부를 조직하였으며, 평양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탁월한 웅변으로 명성을 알렸다.또한 그는 뛰어난 조직가로 1907년 29세 때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하여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에 청년학우회, 1912년 대한인 국민회, 1913년에 흥사단, 1928년에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였다.그는 특히 국내와 미국, 중국에서 민족독립과 교포들의 생활향상을 위해 활약하였고 1919년에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을 지냈으며, 1923년에는 대한독립당을 결성하고 중국 난징에 독립운동 근거지로서 이상촌 건설을 시도하였다.안창호 선생은 4년 반에 걸친 두 차례의 감옥생활 끝에 얻은 병이 악화되어 1938년 3월 10일 경성대학(서울대) 부속병원에서 결국 해방을 보지 못하고 만 59년 4개월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25년 3월 12일 <중국 근대 혁명의 아버지 손문 사망>
중국 혁명의 선도자이자 정치가인 손문이 지난 1925년 3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특히 그는 공화제 창시자로 국민정부시대에는 ‘국부(國父)’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기도 했다.광둥성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손문은 어린시절 하와이로 건너가 서양문화의 우월성을 깨달았다. 이후 홍콩 의학교 재학 때부터 혁명에 뜻을 두어 청나라에 반대하는 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생활 동안 삼민주의를 주장했으며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귀국해 임시 대총통에 추대되었다. 이후 그는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군벌 뒤에 제국주의가 있다는 것과, 인민들과 단결하여 반제(反帝) ·반군벌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러시아혁명을 본받아 국민당을 개조한 뒤,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 노동자 ·농민과의 결속을 꾀하였다. 그리고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하여 북벌을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베이징에서 객사하였다. 1929년 그의 유해는 난징 교외의 중산릉에 묻혔다. 손문의 사상은 1925년 이후 국민혁명운동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그의 ‘삼민주의’는 ▲만주족인 청 나라를 무너뜨리고 한족의 공화국을 세우자는 민족주의 ▲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꾀하자는 민권주의 ▲ 대토지 소유와 독점자본을 제한하여 국민생활을 풍족하게 하자는 민생주의 등이다

1986년 3월 13일 <최은희-신상옥 부부 탈출>
최은희-신상옥 부부가 북한으로 납치된 뒤 8년만인 지난 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탈출했다. 영화감독 신상옥, 최은희 부부 납치사건은 지난 78년 영화촬영을 위해 해외에 머물던 일행을 북한에서 납치한 사건으로, 당시 영화광인 김일성, 김정일을 위해 북으로 납북되어 다시 남한으로 탈출하기까지 북한에서 많은 영화를 제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