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어린이날 공휴일 지정

2004-05-13     공문룡 칼럼니스트
1982년 5월 4일 "대검, 이철희·장영자 구속"

‘건국이래 최대의 경제 사건’으로 불리는 ‘장영자·이철희 어음사기 사건.’ 이 사건은 1982년 5월 4일 당시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불리던 장영자와 그의 남편 이철희가 어음사기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면서 일어났다. 건국 후 최대 규모의 금융 사기사건이자 권력형 금융비리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으며,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병폐의 한 단면을 드러낸 사건으로 꼽힌다.특히 ‘장·이 어음사기 사건’은 정계·경제계를 비롯, 사회의 각 분야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경제계에 불어닥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금융혁명’으로 일컬어지는 6·28조치가 단행되었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금융실명제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제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정치권력을 등에 업은 장영자는 1981년 2월부터 1982년 4월까지 자기자본 비율이 약한 건설업체에 유리한 조건으로 자금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대여액의 2배, 최고 9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아 사채시장에서 할인하는 수법으로 총 7,111억 원의 어음을 유통시켰다. 이 가운데 어음사기 행각을 벌인 액수만도 6,404억 원에 달했다.여당인 민주정의당의 사무총장이 물러나고, 법무부장관이 두번이나 교체되었으며, 이 사건과 관련해 31명의 피고인이 법정에 올랐으나, 그 중 11명만이 구속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장영자·이철희 부부는 모두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이철희가 먼저 가석방된 뒤, 장영자는 복역 10년 만에 역시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장영자는 1994년 다시 100억 원대의 어음 사기사건으로 구속되어 복역하였고, 2001년 5월에도 220억 원대의 구권(舊券)화폐 사기 행각을 벌인 혐의로 구속됨으로써 세 번째로 복역하게 됐다.

1975년 5월 5일 "어린이날 공휴일 지정"

지난 75년 어린이날이 공휴일로 지정됐다.방정환 등 일본유학생 모임인 색동회가 중심이 돼 1923년 5월1일 어린이날이 제정됐다. 이후 1927년에 날짜를 5월 첫 일요일로 변경했고, 1939년 일제의 억압으로 한때 중단되기도 했다.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5일에 다시 어린이날 행사가 열렸고, 1961년 제정·공포된 아동복지법에서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지정했다.이후 73년 기념일로 지정했고 75년부터는 공휴일로 지정했다.

1956년 5월 5일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 후보 호남 유세중 사망"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해공 신익희 선생이 지난 56년 5월 5일 사망했다. 신익희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내무차장·외무차장·국무원 비서장·외무총장 대리·문교부장 등을 역임했다. 광복과 더불어 귀국, 김구 등 임시정부와 거리를 두며 이승만과 제휴했다. 하지만 정부수립 후 이승만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1949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 국회의장에 선임됐다. 이후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발전시켜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56년 5월 5일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 자유당의 이승만과 맞서 호남지방으로 유세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국회의원 선거 실시"

8·15광복 후 미군정하에서 국제연합(UN)의 감시 아래 1948년 5월 10일 한국 최초의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이날 선거는 북위 38도선 이남 지역에서만 실시됨으로써 통일된 독립국가 수립은 좌절되고 남북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분단이 기정사실화됐다.선거를 앞두고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으며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을 추진했던 세력들은 공식적으로 선거에 불참했다.선거를 통해 제주도 2개구를 제외한 전국 198개 선거구에서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제주도만은 이른바 4·3사태 발생으로 무기한 연기됐다. 정당별 분포도를 보면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승만 지지파)가 54석으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하였고, 한국민주당이 29석, 대동청년단 12석, 조선민족청년당 6석, 대한독립촉성농민총동맹이 2석, 그 밖이 95석(무소속 84석 포함)이었다. 이렇게 ‘제헌 의회’는 구성됐다. 초대 국회는 7월 12일에 헌법을 제정하고 20일에 이승만과 이시영을 제1공화정의 정·부통령에 선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