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공로명 편] 외무부장관 시기 비하인드 스토리-㉕

2021-05-28     온라인뉴스팀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강릉 잠수정 사건

“자결한 북한군인 시체 11구가 발견됐다”

- 1996년 9월에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북한 잠수정이 강릉으로 침투해서 상당히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났고 많은 피해가 일어났다. 이때 미국의 반응이 마치 1968년 청와대 기습사건 이후에 오히려 우리 측을 자제시키던 모습이 있었는데, 그때도 비슷했다.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이 모든 당사자들의 추가 도발 자제를 촉구하는 발언을 했다. 
▲ 바로 제가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 크리스토퍼 장관의 발언이다. 도발자나 피도발자나 동일하게 취급했다. 여러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만, 순서대로 말씀을 드리면 199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서해 5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휴전선 비무장지대에서 북한의 도발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드디어 9월17일 평양방송을 통해서 휴전협정이 사문화가 되었으니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을 해야겠는데, 만약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고 일어나는 모든 사태는 미국의 책임이라고 하면서, 한반도에서 ‘제2의 조선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대단히 도발적인 성명을 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다음 날 새벽에 강릉에서 북한 잠수정이 출현했다. 발단은 그날 새벽에 강릉의 택시 운전수가 손님을 태우고 지나가는데 도로 옆에 다수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뭐하는 사람들인가 하고, 손님을 내려놓고 다시 가서 보니까 사람들은 없는데 해안 쪽에 고래 같은 것이 올라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고래가 아니고 북한의 잠수정이라는 거다. 그래서 경찰에 신고를 했다. 그래서 군·경이 출동해서 조사하니 북한의 잠수정이었다. 그래서 수색전에 바로 들어갔는데 전후는 어떻게 되던 간에, 27명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데 농부의 옷을 갈아입고 밭에 있는 것을 부락민들이 발견해서 신고해서 잡혔다.  

이 사람 진술에 따르면, 그때 상륙한 사람들은 북한 인민군 정찰국 소속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남한에서 미군이나 한국군의 기지, 공항 등의 상황을 탐지하기 위해서 왔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수색을 하다 보니, 자결한 북한군인 시체 11구가 발견됐는데 뒤에서 권총으로 쏜 것이다. 분명히 자기들끼리 죽인 것인데, 그중에 하나는 인민군 대좌 군복을 입고 옆에 권총까지 차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11명은 죽이고 14명이 도주를 했다. 

- 죽은 사람들은 배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고, 특수 정찰대원 14명은 전투원이었나. 
▲ 생포된 1명을 제외한 13명 전원이 사살됐는데, 이때 우리 측도 14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민간인 4명, 군인 8명, 경찰관 2명이 희생을 치르게 됐다. 생포된 사람 이름이 이광수인데 아까 이야기한 인민군 정찰국 소속이고 그러한 목적으로 왔다고 했다. UN 안보리에서 즉각 비공식 회의를 소집해서 한국대사에게 상황을 들었다. 그리고 UN 북한대사에게 나와서 설명하라고 하니까, 거듭되는 의장의 요구에도 무시하고 나오지 않아서 결국 의장성명이 발표됐다. 이 사건은 18일에 일어났는데, 북한은 9월23일에 “잠수함이 훈련 도중에 기관 고장으로 표류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소환하라”고 했다. 

그래서 9월24일 김영삼 대통령이 일본 언론사 간부들을 만난 자리에서 대북 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생각 중에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10월1일 국군의 날 연설에서는 “북한의 명백한 태도 변화가 있을 때까지 일방적인, 시혜적이거나, 교섭에 응하지 않는 대북 지원은 일절 없다. 고려하지 않겠다. 8.15 경축사에서 밝힌 대북 후속 조치와 정부 차원의 인도적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것 외에 “북한의 명백한 사과와 재발 방지 보장이 없는 한, 4자회담 추진과 KEDO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한국이 북한에 대해 강경한 자세로 전환하면, 북한의 핵 활동 동결을 추구하는 미국에게는 상당히 난처한 상황인 것이다. 협상에 의한 문제 해결을 추진하는 4자회담도 좌초됐다. 그러니 한국전쟁 이래 처음으로 미국이 한국과 북한 사이의 이해 충돌에서 샌드위치가 됐다. 

돈 오버도퍼가 The Two Koreas에서 이러한 미국의 입장에 대해 쓴 글이 있다. “남북한 대결 상황에서 워싱턴은 두 한국 사이에 낀 상황에 당면하게 됐다. 즉 핵 동결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한반도에서의 평화 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관계도 보호해야하고 한편 오랜 동맹인 한국과의 단결을 유지하고, 남한의 안보와 미군을 보호하기 위해서 고려를 해야 하는 난처한 입장이다”라고 했다. 

그런데다가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이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직후 모든 당사자의 자제가 필요하다는 논편을 했었는데, 물론 국무부에서 정정 보도를 했지만 이미 손상은 끼친 대로 끼쳤고 북한과 동렬에 높고 자제하니, 이게 동맹국 이냐는 이야기가 나온 거다. 

미국 측에서는 상당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이때 10월14일에 중앙일보 가두판 1면에 한국군은 북한에 대해 공·해·지에 12개 전략적 타격 목표를 설정하여 북한 도발 시 타격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우리 보안사가 군사정보 유출 조사에 착수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래서 10월18일에 미국 CIA 존 도이치 국장이 한국을 방문하게 됐다. 이분이 오자마자 나를 찾았다. 정보부장이 한국에 오더라도 외무부장관을 찾아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인데 와서 이 이야기를 했다. 

“북한의 도발이 있을 경우 한국 정부는 미국과 정해진 표준운용절차(SOP)에 따라서 합의한다. 그것이 우리의 확고한 방침이고 국방부에서도 그렇게 알고 있다” 이에 대한 당시 미국 측 반응을 보면, 미국 측이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후 김영삼 대통령의 대북 강경조치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려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전후해서 제가 건강과 관련된 이유로 사표를 제출하게 됐다. 그때 침투사건에서 여러 가지 미국 측과 했던 제 대응이 청와대 입장에서 못마땅해서 제가 사표를 내는 것 아니냐는 인상을 미국 측이 받았던 것 같다. 

사표 낸 이후에 수도국군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그때 레이니 대사가 성조기를 날리면서 미국 대사 차로 병원에 왔다. 그때 그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데, 미국 측에서 제가 강릉 침투사건 때 취한 입장이 상당히 톱 레벨(높은 지위)에서의 이견이 내재해 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봤던 것 같다. 

제가 사표를 내고 한 2~3년 후에 김영삼 대통령도 임기를 마치시고 김 대통령의 생신 축하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그때 사표를 내고 처음으로 김 대통령을 만났다. 그때 김 대통령이 제가 사표를 냈을 때의 이야기를 회고록에 썼다고 말씀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