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공로명 편] 외무부장관 시기 비하인드 스토리-⑮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APEC 한·일 정상회담
“일본은 아직 제국주의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APEC 회의 당시에도 한·일 관계가 상당히 어려웠다. 역사 공동위원회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장관으로서 전반적으로 한·일 관계를 어떻게 풀어가려고 했나.
▲ 김영삼 대통령과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와의 정상회담이 우리에게는 의미있는 회담이었다. 그 정상회담은 사실 11월18일 토요일 오후 3시 오사카 시장 공관에서 열렸습니다만,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에 11월11일자 우리나라 동아일보에 에토 다카마 일본 총무처장관의 망언이 보도됐다. 그 망언의 내용은 “한일합병이 무효라고 한다면 국제조약은 성립되지 않지 않느냐? 따라서 구한말에 한·일 간에 체결된 협정은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입장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이야기였다. 이 사건으로 한국 국민들이 대단히 격양했다. 우리 정부로서도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만약 일본 정부가 적절하게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한·일 외상회담과 정상회담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18일 정상회담에 앞서서 고노 외상과 저하고 사이에 15일 한·일 외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만, 이 양 회담을 모두 취소하겠다는 각오로 일본측에 강하게 조치를 요구한 결과 결국은 장본인인 에토 장관이 사임함으로써 외상회담과 정상회담이 예정대로 열렸다.
- 약간 혼선이 있었던 것 같다. 무라야마 총리가 한일합병에 대해서 유효하게 체결되었다는 이야기를 했었고 뒤에 에토 총무처장관이 식민지배가 한국에 좋은 일을 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바람에 더 문제가 되지 않았나.
▲ 그렇다. 특히 에토 장관의 발언을 문제 삼았었다. 이때 독도 문제가 있었고, 또한 무라야마 총리가 한일합방 문제에 대해 사무관료들이 써준 답변을 그대로 국회에서 읽어서 문제가 격양된 레벨로 올라왔다. 자연히 이 사건이 외상회담에서 역사인식의 문제로 제기됐다. 그래서 우리가 독일관계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한·일 양측에서 이야기되고 있었다. 민족적 편견이 없이 역사 연구를 할 필요가 있겠다. 그래서 미래를 향한 우정을 쌓아나가는 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서로 하게 되고, 고노 외상은 특히 전문가들이 보다 바른 역사인식을 갖고 한·일 양측의 공동 작업을 통해 그러한 인식을 구축하자는 점진적인 안을 일본 스스로가 제기해왔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일본 정부는 “그해부터 평화우호교류 계획의 일환으로서 역사연구에 대한 재정 지원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공동 역사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18일 김영삼 대통령과 무라야마 총리 정상회담에서 고노 외상이 외상회담에서의 합의를 언급을 하면서 역사공동위원회를 발족했으면 좋겠다고, 양 정상의 축복을 바라는 발언을 했다. 따라서 양 정상은 대단히 좋다고 했고, 그로써 역사공동위원회를 발족하기 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고노 외상도 역사공동위원회 합의를 위해 이듬해 방한을 하는 진전이 있었다.
그런데 공동연구위원회는 1996년에 와서도 발족이 지연되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아주국 당국에 이유를 물었더니 “일본 측에서 역사연구에 참여할 연구자를 구하기가 어렵다”라는 대답이었다. 일본 학자들이 기피한다는 이야기다. 한·일 관계 연구 종사자들이 한국에 대해서 이해를 갖는 입장을 취할 경우에 일본의 우익들이 전화로 여러 가지 욕설을 퍼붓는 행패를 부린다고 했다. 그래서 선뜻 제의를 하더라도 수락하는 학자들이 없어 난관에 봉착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1996년 내내 공전을 하다가, 제가 정부를 떠난 후인 1997년 5월에 가서 비로서 양측의 공동연구위원회가 구성되고 한국 측에서는 지명관 교수, 조선일보의 윤일 논설위원, 연세대학교의 이승만 박사 연구로 유명한 유영익 교수 등이 한국 측의 운영위원이 됐다. 일본 측에서는 스노베 료조 전 외무차관, 야마모토 다다시 국제교류재단 이사장으로, 한국에 대서 고마운 역할을 많이 했다. 그리고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학 교수가 일본 측 운영위원이 되어 각각 10명의 학자를 위촉해서 1997~1999년 2년간 이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다시 제2차 공동연구 위원회가 2001년 10월에 발족해서 전기·후기로 나눠서 활동을 했고, 마지막에 제2의 활동이 끝나고 공동발표가 있었다고 알고 있다.
- 그 성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를 하나.
▲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노력이 효력을 갖는 성과를 아직까지는 못 내고 있다. 아직까지 역사인식 문제가 있다. 그러나 최소한 이러한 역사공동위원회의 연구 등을 통해서 한·일 양측 학자들의 의견을 공유했고, 고대사 분야에서 역사적으로 상당히 왜곡되었던 연국들이 시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 가량 임나일본부의 존재라든가 하는 것들이다. 이런 것을 일본에서도 주장하는 사람이 없다고 들었다. 그다음에 임진왜란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들도 많이 나와 있고, 다만 현대사에 와서는 역사 인식의 차이가 아직도 있고, 현대사 분야에 대처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아직도 문제라 되는 것은 구한말에서부터 오늘에 이르는 현대사, 현대에 대한 양측의 인식이 다르다. 일본은 아직도 제국주의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한국은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것에서 오는 콤플렉스가 있다. 이런 영향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까지 파급되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1993년에 고노 담화를 통해 일본 정부의 책임을 시인했고 사과했다. 우리 정부는 그 사과를 수락하고, 당시 외무부가 성명을 발표해 더 이상 외교 문제로 삼지 않는다고 했는데 오늘날 다시 외교 문제가 되고, 한·일 관계를 대단히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됐다. 결국 일본은 왜곡된 역사인식을 시정해야 하고, 한국 국민은 역사에 대해 좀 더 너그럽게 보고 전적으로 타율에 의한 오류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과오도 많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특히 구한말의 역사는 그러한 인식 없이는 객관적으로 사실을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다.
- 말씀하신대로 우리가 역사의 교훈을 살리기 위해서는 일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인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는지 교훈도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 우리는 항상 역사인식 문제를 다루면서 독일의 예를 드는데, 독일이 주변국가에게 받아들여진 커다란 이유는, 독일 스스로가 역사의 과오를 인정하려고 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