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공로명 편] 외무부장관 시기 비하인드 스토리-③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제네바 합의와 한국형 경수로 문제
UN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
- 실질적으로 합의가 이행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상당히 많았던 것 같다. 제네바합의가 맺어지면 그에 따라서 미·북 간 연락사무소도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 논의도 제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외의 협상 내용들도 대부분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중유지원이나 경수로 관련 협상은 다른 협상에 비해서는 잘 진척됐다. 그 과정 속에서 북한은 끊임없이 경수로에 대해서 한국형이라는 용어를 지우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 갈루치가 아침 10시에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데 도쿄에 가서 쿠알라룸푸르의 허바드 부차관보와 다시 통화해서 재지시를 하겠다고 했다. 현지에 가있던 김숙 장관보좌관이 밀어붙여서 결국에 합의가 됐다. 쿠알라룸푸르에서 공급계약에 대한 발표가 나는 그날, 곧바로 KEDO를 소집해서 서울에서 “참조발전소는 울진 3·4호다. 그리고 주계약자는 한전이다”라는 내용에 의결을 했고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됐다. 그때 미국도 “대통령이 KEDO를 서울에서 소집하셔서 의결하면 이중으로 보장 장치를 만들 수 있지 않나?”라 했고, 실제로 그렇게 해서 KEDO의 의결도 있었다. 그렇게 쿠알라룸푸르합의 자체도 명확해졌고, 그래서 결국은 합의가 되고 KEDO 건설이 이루어진다.
쿠알라룸푸르 교섭 이후에는 KEDO가 경수로 건설을 위한 창구 됐다. 그래서 KEDO와 북한 간에 공급협정이 맺어진다. 공급협정 교섭이 두 번에 걸쳐서 있었는데 1차 교섭이 1995년 9월이었고, 2차 교섭이 9월30일에서 11월15일까지 갔다. 원래 6개월 이내에 합의가 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제네바합의 1년 후에 결국 공급 계약 합의에 이르게 됐다. 그러니까 모든 일정이 자꾸만 뒤로 밀리는 거다. 그래서 경수로 착공은 1997년 8월17일에 함경남도 신포에서 시작됐다.
신포는 후에 금호지구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북한이 경수로 건설을 하면서 신포를 금호로, 군명을 바꾼 모양이다. 이 건설이 쭉 계속되다가 2005년 11월에 가서 KEDO가 정식으로 경수로 공급 중단 결정을 내렸다. 왜 중단했느냐? 2002년 10월4일에 당시 평양을 방문했던 제임스 켈리 전 차관보가 북한 강석주를 만났다. 그때 파키스탄을 통해서 미국이 입수했던 우라늄 농축 시설에 관한 구체적인 증거자료를 제시하면서 짓고 있느냐 물었더니 강석주가 부정을 못했다. 강석주가 시인한 모양새가 됐다. 2002년에 이 사실이 확실해지니까 경수로 공사를 중단했다.
이 공급 계약이 체결되고, 실제로 1997년 8월부터 공사가 시작돼서 공사가 중단될 때까지의 8년 동안에 경수로 2기 공사를 위한 비용으로 46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중에서 중심적 역할인 한국이 70%, 미국 돈으로 32억 2,0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3조 5,420억 원이다. 그리고 일본이 22%인 10억 달러, 미국이 8%로, 주로 KEDO가 공급하는 중유, EU가 7,500만 유로를 내기로 했다. 실제 자료를 찾아봤더니 우리 한국이 그동안에 11억 8,660만 달러를 사용했다. 그리고 일본은 4억 5,280만 달러를 기여했고, 미국이 4억 511만 달러, EU가 1억 2,330만 달러, 기타 국가들이 3,280만 달러를 썼다. 그리고 우리가 공사를 중단하면서 돌아올 때 신포에 남겨놓은 자산이 꽤 있었다. 중장비가 93대, 일반장비가 190대, 공사자재 등은 지금 전부 북한에 속해 있다. 이렇게 해서 이 경수로 사업은 2005년을 마지막으로 끝났는데, 우리가 1992년부터 북한과 핵 교섭을 시작해서 1994년 남북 간 핵 교섭이 미국 손에 넘어가고 제네바합의로 이어져서 북한의 경수로 공급을 위한 건설사업 등으로 이어왔던 것이다.
- 화제를 좀 벗어난 이야기지만 우리 사회도 좀 문제가 아닌가. 핵 문제를 우리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북한의 요구사항을 우리와 미국이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핵을 만들었다는 식의 담론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말씀하신 우라늄 농축 이야기도 얼마 전까지 고관을 지냈던 분들조차 미국이 조작했던 거라는 이야기를 했던 적도 있었다.
▲ 지금 천안함 폭침도 자작극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러는데, 그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실용주의적인 접근이 우리에게 너무나 미흡한 것 같다. 너무나 이념적이다. 항상 이념이라고 하는 색안경을 끼고 들여다보니까 제대로 보이질 않는 거다. 최근에 화제가 됐던 그 이슬람 7개 국가인가? 그 지역 출신자들에 대한 비자를 거부하자 영국 국민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국빈방문을 반대하는 청을 했다. 백몇십만 명이 청원 서명을 했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공식방문은 좋으나 국빈의 격은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실용적인 필요에 의한 실질적인 비즈니스 하겠다는, 그 얼마나 실용주의적인 접근인가. 우리 같으면 아마 전부 반대할 거다. 이건 국민성의 차이인가 하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 제기하신 문제처럼 우리의 안보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에 대해서만큼은 여야가 하나가 되어야 할 텐데 그러질 못하니 옆 나라가 그걸 이용할 수 있는 빌미를 주는 거 아닌가.
결국 북핵 문제로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간 협상을 해오고 많은 투자를 했는데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탓도 굉장히 크다는 생각을 가져야 되지 않나 한다. 북의 핵 보유에 대한 집념을 우리는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다. 제가 김정은이라면 핵을 포기하고 나라를 개방해서 국민들을 배불리 먹게 하고 좀 더 자유롭게 살며 웃음 짓게 할 거다. 이북에서 탈북한 우리 동포들이 남한 사회에 와서 얼마나 활발하게 사나. 텔레비전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거 볼 때마다 왜 그런 길을 택하지 못할까 생각한다. 아마 현 시점의 북한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 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자꾸만 극단론이 나오는 거다. 대화를 통해서 해결하기는 어렵고, 단지 일시 고통을 중화시킬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건 해결 방법은 아닌데, 연명책이라고 할까?
- 우리나라는 이상하게 UN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감회가 있는 나라인 것 같다.
▲ 그렇다.
- 장관으로 부임하시고 나서 저희가 UN 안전보장이사회에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꾀하게 되는데, 그런 외교를 시도하게 되었던 배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가.
▲ 글쎄다. 우리나라 정부 수립에 UN이 힘을 보탰고, UN군이 한국전쟁에 실제로 참전했다. 그런 면에서 한국 국민에게 UN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우리가 1992년에 정회원이 됐을 때, 그 감회가 적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옵서버로 있는 동안에는 투표권이 없었지 않나? 그래서 우리도 UN의 중심 무대에서 발언권과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는 소원이 있었는데, 1992년에 회원이 되고 나서 곧이어 왜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이 될 수 없겠느냐 생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