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독재자 박정희 집권의 ‘명과 암’
2004-04-21
박정희는 사생활에도 운이 없었다. 맨 처음의 부인과는 이별했다. 열애한 동거 여성은 떠나버렸다. 청와대를 지켜 온 아내는 흉탄으로 쓰러졌다. 아내가 죽은 후 그는 고독을 달래기 위해 술에 빠졌다. 박정희는 키가 작고 피부는 약간 검은 시골 선비 스타일이었다. 과묵하고 좀처럼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는 그에게는 항상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그것은 좌절과 배신을 거듭 당한, 인간 불신에 빠진 이의 고독이 투영된 것이다.그의 인상은 어둡다. 쿠데타 직후 공수 부대(낙하산 부대)의 군용 점퍼에 선글라스를 끼고 경직된 표정으로 서있는 박정희 소장의 사진이 공개되었다. 지금까지도 5·16의 상징으로 각인된 이 사진은 실로 ‘쿠데타 냄새가 물씬 풍긴다’ 고 할 만한 영상이다.
그러나 그 영상은 매우 어둡다. 그의 정신적인 트라우마(심리적 외상)를 보여 준다. 그의 생활은 검소했다. 다른 벼락출세한 사람들처럼 사치스런 생활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혼자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술안주로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손으로 민 국수를 좋아했다. 청와대의 식사에 초대된 사람은 국수가 나오는 데 질릴 정도였다. 돈에 욕심이 없었다. 자손에게도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 친척에게도 이권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였다.서거 후, 집무실 수납장에서 수십억원의 현금이 발견되었으나 그것은 정치 자금용이었다. 개인을 위한 축재는 아니다. 재벌에게 혜택을 주고, 그 보답으로 정치 자금을 헌납시켰다. 이것이 정권유지비로 충당되었다. 박 대통령 뒤의 권력 계승자는 그것을 흉내냈지만 모두 개인용의 축재로 바뀌었다. 그래서 군벌과 재벌의 유착이라는 못된 전통을 남겼다.
세계로 진출한 Made in korea
박정희 정권 18년간의 유산은 음으로 양으로 모두 거대하다. 플러스 유산은, 먼저 한국인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 준 것이다. 만년 게으른 근성에 사로잡혀 있던 한국인은 강력한 리더십 아래에서 경제 성장을 달성했다. 1인당 국민 소득80달러에서 1,200달러(79년)의 중진국으로 발전하였다.남북 체제 경쟁에서도 우위에 섰다. 수출입국이라는 표방아래 ‘Made in Korea’가 세계로 진출하였다. 한국인은 자신감을 얻어 가슴을 쭉 펼 수 있게 되었다. 얄궂게도 이 ‘경제적 발전으로 인한 시민 사회 대두’ 가 독재 정권을 붕괴시켰다.마이너스 유산도 그에 못지 않게 크다. 박정희는 정권 비판을 막아 민주주의를 죽였다. 언론 통제로 매스컴을 탄압하였다.박정희는 인간 형성기에 군국 일본의 교육이 철저히 주입되었다. 군국주의적 사고가 뼛속까지 배어 있었다. 그는 일본 군부에 의한 나라 세우기를 만주에서 목격했다. 박정희의 국가 경영관에 그 영향이 엿보인다.
군국 일본의 국가 총동원을 담당한 것은 기획원이다. 경제 기획원이라는 명칭은, 처음에 건설부였다. 만주국의 경제 개발과 중공업화가 교과서였다. 물가 통제, 물자 동원 계획 등 경제 통제 방책은 전쟁 전 일본의 국가 총동원 체제의 모방이다. 그가 가장 힘을 기울인 농촌 갱생을 위한 새마을 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전쟁 전 일본의 농촌 갱생 운동과 만주 개척민을 육성하던 이바라기켄 우치하라의 농민 학교와 일맥상통한다.그는 정당 정치가를 몹시 싫어했다. 매스컴도 피했다. 언론 통제를 위해 정부 부서로 공보부를 만들어 공보관을 배치하였다. 민주주의 국가라도 대변인 제도가 있다. 정부 홍보활동의 일환이다. 그러나 박 정권의 공보관은 언론 통제를 위해서 존재했다.박정희의 행동 원리는 ‘통제 우선, 중점 집중, 좁은 시야’라는 군인 특유의 체취가 배어 있다. 박정희는 영남 지역 출신 인사로 정권을 굳혀갔다.
네포티즘(족벌 인사)과는 상관이 없다 해도, 리저널리즘(지역 차별)은 강해졌다.군국 일본의 교육은 국제적 감각의 결여가 특징이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 어느 만큼 국제적 파문을 낳을까 등에는 둔감했다. 박정희는 70년대가 되고부터는 해외 여행을 전혀 하지 않았다. 정권 초기에는 일본, 미국, 인도 등으로 외유했으나, 정권 후반이 되자 외유를 중단하였다. 73년에 일본을 국빈 방문한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직전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 체제를 확립하였다. 일본 방문 계획은 교란 작전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려 했던 것이라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박정희-김일성의 기구한 말로
박정희와 김일성 두 사람은 외세를 배제하는 내셔널리스트(민족주의자)라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양자가 주장하는 외세 배제란 독재 유지를 위한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주, 자립, 자율의 내셔널리즘은 아니다. 박정희에게 군대는 권력의 기반이었다. 미국에 있어 군대는 냉전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전략 체제 중의 하나다. 전시를 대비한 ‘예비 품목’이다. 그 ‘예비 품목’이 과도한 내셔널리즘을 지향하면 마찰 상극이 생겨난다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박정희의 암살은 그 논리적 귀결이다.박정희는 독재 정치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경제 개발을 내세웠다. 그러나 개발 독재에 내재하는 모순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경제 개발이 성공하든, 안 하든 결국 독재가 불필요해진다. 더구나 그는 경제 개발 방식으로 수출 확대를 채택하였다. ‘수출 확대’는 결국에 가서는 대외 개방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필수 코스이다. 대외 개방을 하면 독재는 지속되지 못한다.그런 점에서, 북한은 기아와 공포 정치로 독재를 계속하였다. 그것이 독재 정치에서는 오히려 정답이다.경제적 번영을 가져온 박정희는 암살되고, 기아와 공포의 늪으로 국민을 몰아넣은 김일성은 침대 위에서 편안히 눈을 감은 것은 아이러니라 하겠다.박정희는 후계자를 키우지 않았다. 김일성은 아들에게 세습시켰다. 독재자로서 신용할 수 있는 것은 혈육밖에 없는 것이다. 두 사람 다 인간 불신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그 점에서도 마찬가지다.그러나 박정희에게는 한국의 권력자에게 공통된 동족 기용의 네포티즘(족벌 인사)은 없었다.
일가에 얽힌 스캔들이 생기지 않았던 것은 신기한 일이다.한국의 여론 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중에서는 박정희의 평가가 단연 선두다. 한국 경제를 발전시킨 업적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축시킨 마이너스 유산도 그냥넘길 수 없다. 박정희는 한국인의 의식이 민주주의 정치를 실현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박정희 사후의 한국 정치 양상과 전개 방향은 그 점을 실증하고 있다.그가 눈을 감은 지 이미 23년이 지났다. 박정희 기념관 건설을 둘러싸고도 찬반 양론이 시끄럽다. 그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있지 않은 것이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