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비극적 말로 청와대 내부서 싹터
2004-04-14
79년에 이란의 팔레비 정권과 니카라과의 소모사 정권이 붕괴하는 등 해외의 독재 정권이 계속 쓰러졌다. 그에 자극을 받은 한국의 재야 저항 운동은 더욱 거세져 갔다.야당 당수 김영삼은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박 정권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정부 여당은 이 발언을 들어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했다. 정국은 강경해졌다. 때마침 노동 쟁의도 심각해졌다. 부산과 마산에서 반정부 시위가 드높아졌다. 시국의 대응을 둘러싸고 차지철 실장의 강경 노선과 김재규의 온건 노선이 대립했다.김재규는 이대로는 대미 관계가 점점 악화되리라고 예측하며 정국의 사태에 대해 불안해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의 대응책을 확실하지 않다며 질책하고, 차 실장을 두둔했다.
김부장의 경질에 대한 말이 나돌았다.79년 10월 26일 밤, 청와대 부근의 궁정동 안전 가옥에서 대통령,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대통령 비서실장등 4인이 술자리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시국을 둘러싼 차 실장과 김 부장의 말다툼이 시작되었다. 김재규 부장은 권총을 뽑아 차 실장을 사살하였다. 이렇게 되면 대통령도 살려 둘 수 없다. 김재규는 대통령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이렇게 해서 박정희 대통령은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향년 62세 기이하게도 박 대통령이 암살당한 10월26일은 70년 전, 한국침략의 주역 이토우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 앞에서 애국 지사 안중근에게 암살당했던 바로 그 날이다.쿠데타는 한국에 ABC를 가져왔다.
박정희는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전임 이승만, 윤보선 대통령이 명문가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관비로 사범학교, 군관학교, 사관학교에서 공부했다. 매우 힘들게 공부한 그는 근면한 노력가였다.그가 정권을 잡은 것은 활동력이 풍부한 43세의 한창 때. 전임자들이 통치 수단으로 정계의 권모술수를 내세운 것과는 반대였다. 그는 군인 기질로 정당인을 싫어했다.‘정당꾼들은 모두 흙 배에 태워 바다에 가라앉혀 버려라’고 하는 게 그의 입버릇이었다.그는 군인답게 늘 ‘지휘관 선두’의 원칙을 엄수했다. 현장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였다. 그는 경제 개발 목표로 항상 구체적인 숫자를 요구하였다. 매년의 경제 성장률, 수출목표, 물가 억제선 등을, 추상적이 아닌 구체적 숫자로 요구하였다. 매월 경제 기획원에서 개최되는 월간 경제 동향 브리핑에 직접 참석했다. 담당장관에게 직접 보고를 받고, 동석한 경제 관료에게 그 숫자를 재확인시켰다.
박정희는 다른 대통령과는 달리 일가친척을 인정으로 봐주는 네포티즘(족벌인사)이 없었다. 일가가 권리와 관직에 관여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그것은 빈농이었기에 일가 중 고위 자리에 앉을 만큼의 기량을 갖춘 자가 없었던 까닭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박정희의 신조와 기질이 네포티즘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대통령들의 경우 박정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성장 과정이라도 네포티즘에서 벗어나지 못해 비극적 말로를 스스로 재촉했던 것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박정희는 친인척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수성가했기 때문에 네포티즘을 좋아하지 않았다.박정희는 군대라는 집단 조직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조직을 움직이는 노하우를 잘 알고 있었다. 정당인 출신으로 실무에 어두운 다른 대통령과는 달랐다. 게다가 주위에 인재를 모았다. 당시, 힘으로 보나 인재 구축 측면에서 보나 한국에서 최대 최강의 조직은 군대였다.
6·25 전쟁으로 많은 인재들이 군대에 들어갔다. 그들은 휴전 후 미국에서 최신의 조직 관리 기법을 배웠다.박정희의 쿠데타는 한국에 ABC를 가져왔다고 한다.A란 아미(군대)를 말한다. B는 브리핑, C는 차트다.현재 한국의 모든 조직에서 활용되는 브리핑, 차트 등은 바로 군대에서 전파된 것이다.박정희는 정권을 잡은 후 행정관료와 교수를 탁월한 수완으로 활용하였다. 무명 대학의 교수를 재무 장관으로 발탁하여 활용하였다. 과장급을 직접 활용하여 조직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했다.이들 테크노크라트가 박 정권 18년간의 행정을 지탱하였다. 인재등용에서 격식 등은 무시됐다. 거물 정치가가 취임한다는 상식을 깨고 서울 시장으로 무명의 부산 시장 김현옥을 발탁했다. 공병장교 출신의 김현옥이 부산의 도시 건설에서 역량을 발휘한 것을 눈여겨 보았던 것이다.능력이 있으면 야당 정치가라도 전력을 묻지 않고 거리낌없이 기용했다.
부총리 태완선, 주일 대사 김영선이 그렇다. 김대중 납치 사건 후, 복잡해진 한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타나카 총리와 절친했던 김영선을 기용한 것이다.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냉혹하고 비정한 일면도 있었다. 부총리로 거듭 기용한 장기영의 해임극이 그 전형이다. 장 부총리가 포항 종합 제철 기공식에 참석해 있는 동안 라디오를 통해 해임을 발표했다. 내로라 하는 사람들과 일반 국민들로 가득 찬 행사장 공식 석상에서 창피를 준 것이다. 장 부총리의 지나친 자신과잉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여당 재정 위원장으로 권세를 흔들었던 김성곤 의원도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앙 정보부에 연행하여 정계에서 은퇴시켰다. 조카사위로 쿠데타 동지였던 김종필도 견제하여 세력을 조기에 꺾었다. 미국에서 망명한 ‘배신자’ 김형욱도 79년 10월 파리에서 실종되었다. 여기에도 박 정권 개입설이 나돌고 있다.
박정희는 부하를 경합시켜 서로 견제하게 하였다.‘분할해서 지배하라’는 마키아벨리즘을 실행하였다.그러나 그것이 비명의 최후를 마치게 하였다.박정희는 측근에 일본 귀국자를 모았다. 최고회의 초대 비서실장으로 포항제철을 창업한 박태준, 박종규 경호실장,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등이 그렇다. 군인뿐만 아니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렴, 외무 장관 김동조, 국무 총리 최규하 등, 관료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군국주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박정희 입장에서는, 군국주의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일본 귀국자와 담소하는 것이 편안했을는지도 모른다.쿠데타 전날 밤 동지와 함께 술잔을 나누며 박정희는‘채찍소리 고요히 밤강을 넘어/ 새벽녘 천병의 지닌 깃발을/ 잊을 수 없는 원한으로 10년 한칼을 갈아/ 별빛 아래서 행렬을 돌린다.’라는 라이산요우의 시를 읊었을 정도다.박정희는 만주 인맥과도 깊은 인연을 지녔다. 만주 군관 학교출신의 정일권 총리, 이주일 최고회의 부의장과, 만주 관리 양성소였던 대동학원 출신의 최규하 총리를 중용했다. 만주야말로 박정희에게 있어서는 처음으로 엘리트 코스로 가는 표를 거머쥔 추억의 장소였다.
무질서와 혼란이 지배하는 약육강식 천지였던 만주에서 니힐리즘과 마키아벨리즘을 배웠다.박정희는 군에 대해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군 통제술의 일환이기도 했다.젊은 장교 중에서도 4년제 정규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한 제11기생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 중 영남 출신인 전두환, 노태우 대위 등에게 특히 주목하고 심복으로 길렀다. 이들은 군 내부에서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받들고자 은밀한 인맥을 형성한 것이다.선배 장군들도 하나회의 장교들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윤필용 장군 실각에 휘말려 하나회의 일부 회원도 처벌되었으나, 전두환은 오히려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회에서의 지위를 더욱 높였다. 하나회는, 나중에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가 권력을 탈취할 때 활용되었다.
이것이 영남 군벌의 시작이다.박정희는 권력을 잡을 때까지 교사와 군인의 두 가지 직업에 종사했었다. 양쪽 모두 훈육과 지도,명령과 복종을 본질로 한다.박정희에게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이 배어 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는지 모른다. 군인의 사고방식은 명령에 절대 복종, 상의하달에서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반대 의견이 허가되지 않는 경직된 사고는 본래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군인에게 있어서 승리를 대신할 것은 없다. 아무리 코스트를 절감해도 전쟁에 지면 끝이다. 목적 달성이 지상 명령이다. 군인의 사고는 전부 이긴다는 것에 집약된다. 이 사고방식은 경제 정책에서도 재현되었다. 경제 개발에서는 코스트를 무시한다. 목표달성이 최우선이다. 자연히 균형 감각을 잃는다.갑작스런 불균형 개발 방식은, 그 후의 한국 경제의 외화 내빈체질을 결정지었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