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쿠데타, 한국 정치사 대후퇴
2004-04-28
박 대통령의 급사는 권력의 진공 상태를 낳았다. 18년간 지속된 독재 정치 기간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후계자를 기르지 못했다. 최 대통령 권한 대행은 11월 10일, ‘헌법에 기초하여 대통령 선거를 실시, 새로 선발되는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한다’고 발표하였다. 이는 통일 주체 국민회의의 대통령 선출을 의미한다. 야당은 3개월 이내에 헌법을 개정, 신헌법에 따라 2개월 이내에 직접 선거에 의한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11월 24일, 전군 지휘관 회의는 국가안보와 법질서 유지에 합의했다. 군부는 기존 질서 수호를 결의하였다. 정부 여당은 군부지원 아래, 12월 6일 통일 주체 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강행했다. 최규하 대행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최 대통령은 12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를 해제하였다.75년 5월에 발동된 긴급 조치 제9호는 ‘유신 헌법에 대한 부정, 반대, 폐지 주장, 선전 금지, 위반자는 명령 없이 체포’하는 법을 초월한 규제 조치다. 긴급 조치 제9호의 해제로 야당 리더 김대중의 자택 연금도 해제되었다.
12.12 사태의 배경
최규하 대통령 취임 후인 12월 12일 밤, 역사는 다시 한번 바뀌었다.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이 합동 수사 본부원에게 체포된 것이다. 소위 ‘숙군(기강이 서 있지 않은 군을 숙정) 쿠데타’다. 이 사건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군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정 총장 등 선배 장군을 내몬 하극상의 행동이다.박 대통령이 살해되던 날 밤, 정 총장은 김재규 부장의 초대로 안전 가옥 별동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사건 후에는 육군 본부까지 김재규와 동행하였다. 양자가 공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샀다.합동 수사 본부장 전두환 소장은 사건 수사라는 이름으로, 대통령 결재 없이 상관인 계엄 사령관 겸 육군 참모 총장을 체포했다. 노재현 국방부 장관도 연행하였다. 이 무력 행사에 제9사단(사단장 노태우 소장) 제90연대와 공수 부대(낙하산 부대) 등 실전 병력 6천 명이 동원되었다. 각 부대에 산재해 있던 하나회 회원 장교들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정 총장파인 수도 경비 사령관과 특전단 사령관은 이 쿠데타를 전혀 예기하지 못했다. 게다가 실전 병력은 하나회 중견 장교가 전부 쥐고 있었다. 단시간 저항했지만 어찌해 볼 도리 없이 손을 들었다.
정 총장은 전두환 수사 본부장의 과격성과 직선적이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게 못마땅해, 중요치 않은 동해 경비 사령관으로 전임시킬 의향이었다. 이 인사 의도가 외부로 새 나갔다. 전두환 소장은 수사를 방해하려는 음모라며 격분했다. 이것이 총장체포를 단행한 동기 중 하나이다.최 대통령에게는 참모 총장 체포 명령 결재가 강요되었다. 최 대통령은 체포 명령에 국방부 장관의 부서(대통령의 국무에 관한 문서에 국무 총리와 관계 국무 위원이 함께 서명하는 일)가 없다는 이유로 결재하지 않았다. 결국 노 국방부 장관이 보안사령부원에 이끌려 청와대로 연행되어 온 후 사후 결재를 하였다. 대통령 취임 직후의 시점에서부터 최규하는 이미 명목상만의 대통령에 지나지 않았다.숙군 쿠데타를 감행한 전두환 소장이하 ‘신군부’의 핵심은 육사 11기생이다. 한국 육군 사관 학교는 6·25 전쟁 중인 51년에 입학한 11기생부터 정규4년제로 개편됐다. 때문에 11기생은 자신들이야말로 군을 대표하는 엘리트라고 자부하였다.
박정희 대통령도 11기생 중에서 영남 출신의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정호용을 총애하며 우대하였다. 이들은 하나회라는 비밀 그룹을 결성, 단결하였다. 전두환은 하나회의 리더이다.박 대통령 암살 후 ‘유신 독재 체제 청산을 요구’하는 소리가 사회 전체에 넘쳐 났다. 김재규를 재판하는 군법 회의에서 김재규를 의사 취급하며 영웅시하는 변호론도 나왔다. 하나회는 위기감을 느꼈다. ‘숙군 구데타는 대통령 암살의 진상 규명이자, 대통령의 원수를 갚는 것이다’ 는 대의명분을 내세웠다.그러나 실제는 군부의 세대교체를 둘러싼 항쟁이었다. 그 시점까지 한국군의 주류는 육사8기생등 선배 장군들이었다. 쿠데타로 주류인 선임 장군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11기생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 세력이 군의 주류로 뻗어 올랐다. 그 대표 선수 전두환소장이 군부를 장악하였다. 신군부가 다음 노리는 것은 대통령자리다.보안 사령부에 체포된 정승화 총장은 80년 3월, 내란 방조죄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그 6개월 후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됐고 81년 3월에 사면 복권되었다. 김재규는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선고 후 80년 5월 24일에 서둘러 교수형이 집행됐다.
결단력 부족의 덫
청천벽력으로, 생각지 않게 대통령에 오른 최규하는 강원도 원주의 몰락 양반가에서 태어났다.구대한제국 말 유학의 최고학부 성균관의 박사였던 조부에게 한문을 배우며, 유교 전통 속에서 자랐다. 경성 제1공립 보통 학교(현 경기 고교)를 2등으로 졸업했다. 재학 중엔 특히 영어를 잘했다. 41년에 동경 고등사범(현 쓰쿠바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고등사범 재학중에는 가정교사, 번역 등으로 학비를 벌었다. 귀국 후, 일시 교편을 잡았으나, 바로 그만두었다. 43년, 만주관리 양성 기관인 대동 학원에 입학하였다. 동경 고등 사범을 졸업한 그가 왜 교단에서 떠나 만주까지 갔는지는 분명치 않다. 역시 신천지인 만주에서 뜻을 이루려는 동기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동 학원 졸업 후의 만주에서의 경력은 이력서에서 누락되어 있다.만주 체험은 박정희 정권에서 뻗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만주 군관 학교와 대동 학원 출신등 만주 인맥이 큰 틀을 형성하고 있었다.해방 후, 최규하는 귀국하여 서울 대학(구경성 대학) 사범 학교 조교수가 되었다.
강단에 선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특기인 영어를 살려 군정청 중앙 식량 행정청 기획 과장으로 전직하였다.48년 정권 수립 후 농림부 양정 과장, 귀속 농지 관리 국장으로 승진하였다. 그 후 외교 분야로 진로를 변경했다. 51년에 외무부 통상국장의 자리로 옮기고, 52년에 주일 대표부 총영사로 부임했다. 이어 참사관, 공사까지 승진하였다. 59년에 주일 대표부 총영사로 부임했다. 이어 참사관, 공사까지 승진하였다. 59년, 외무 차관으로 승진했으나, 60년의 이승만 정권 붕괴로 사임하였다. 2년간 실직자 생활을 한 후, 62년에 외무 장관 고문으로 복귀했다. 64~67년말에 주말레이시아 대사, 67년에 외무 장관으로 발탁되어 71년까지 재직하였다. 최규하 장관의 외무부 인맥은 라이벌 김동조 장관, 김용식 장관 등과 함께 3대 산맥을 형성했다고 한다.71~75년은 대통령 외교 담당 특별 보좌관으로서 남북 회담과 대미 외교를 책임졌다. 견실한 행정 처리를 인정 받아, 75년에는 김종필 총리 후임으로 국무 총리에 취임하였다.
국무 총리는 대통령 계승 순위 1위다.박 대통령 암살 후 최규하는 생각도 못했던 권력의 최고 자리에 앉았다. 60세였다. 최 대통령은 성실하고 신중하면서 온후했다. 관리로서 실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나친 불안감과, 결단력이 부족하고 소심하여, 현실 추종 타입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비판하는 쪽은, 최 대통령의 주일 대표부 근무 시절을 예로 든다.‘부하 중 유태하 참사관이 있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 직접 연결되고 있는 것을 으스댔다. 위아래 없이 행동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상사인 최규하는 그것을 묵인하고, 차관으로 승진한 것이 한 예’ 라는 것이다.최규하의 단점인 ‘현실 추종’ 은 독재자 입장에서는 편리하다. 그래서 거듭 기용되는 것이다. 최규하는 대통령이 될 때까지 한번도 정당에 가입한 적이 없다. 선거에 의해 공직에 오른 경험도 없다. 외교관 출신으로 정치 기반이 전혀 없다. 대통령 자리가 갑자기 굴러들어 왔기 때문에, 전혀 준비가 없었다. 개인 조직도 참모도 없다. 최 대통령은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의 295일간, 권력의 진공 상태에서 결손을 보충한 데 지나지 않는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