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퇴임 후 국정 원격조정 구상
2004-06-08
전두환은 퇴임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때문에 대통령 경험자 등 원로로 구성되는 국정 자문 회의를 활성화하고자 했다. 국정 자문 회의의 법정 의장으로 취임, 국정을 원격 조정할 구상이다. 수렴청정(뒤에서 대신하는 정치)인 것이다.집무 장소로서, 싱크탱크(두뇌집단)로 구성된 일해재단을 설립하였다.그러나 권력자는 라이벌을 인정하지 않는다.노태우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반기를 휘날렸다. 매스컴은 새 대통령에 동조했다. 국정 자문 회의는 불필요한 기구로서 권력의 이중 구조라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전두환의 수렴청정 구상은 초반부터 무산되었다.88년 4월 제13대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전두환은 대통령 재임중일 때에 이미 88년 제13대 총선거의 여당 후보를 자신의 뜻에 맞는 인물들로 내정해 놓고 있었다. 이른바 공천권을 미리 행사해 놓은 것이다.노태우 대통령은 이에 반발했다. 전두환이 내정했던 공천 인물들을 바꾸었다.
뿐만 아니라, 종래의 중선거구(정원 2명)를 소선거구(정원1명)제로 바꾸었다.공천에서 탈락되어 무소속으로 출마한 전 여당 의원은 잇달아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국회는 여당 소수·야당 다수의 일그러진 현상을 나타냈다.‘야대여소’의 국면이었다.대통령 퇴임 후, 전두환은 사면초가 속에 휩싸였다.친형, 친동생 등 친족 다수가 부정 의혹으로 체포 수감되었다.전두환에 대한 무시무시한 보복이 시작되었다.88년 9월, 전세계에서 선수와 임원, 보도진 8천 명이 모여 서울 올림픽 개회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그러나 정작 대회 개최를 유치한 당사자 전두환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야당은 전임 대통령의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유혈 진압 책임과 재임 중의 부정 축재를 추궁했다. 전두환은 재임 중 통치 자금이라 하여 재계에서 막대한 정치 자금을 받아 관리했다. 재벌은 이권 개입으로 정기적으로 수억 원을 대통령에게 헌금하였다.
전두환은 여당의 정치 자금은 법정 테두리 안으로 한정시키고, 그 밖의 검은 현금은 모두 청와대에서 직접 받았다.정치 자금을 대통령이 직접 수취하는 것은 법률 위반이다. 이를 어길 때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백만 원 이하의 벌금, 수취한 금품은 전액 몰수’라고 ‘정치 자금에 관한 법률’에 규정하고 있다.85년 재계 서열 7위인 국제상사 그룹이 공중분해되었다. 시중에서는 그룹 도산의 진정한 이유는 일해재단 설립에 기부하지 않아 괘씸죄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수근거렸다. 이후 재벌은 앞을 다투어 일해재단에 기부를 했다. 일해재단으로의 기부 총액은 595억 원에 달했다. 그 밖에도, 대통령 부인이 설립한 심장 재단에도 막대한 기부금이 모였다.전두환의 구속을 겨냥한 여론이 들끓었다. 전두환은 88년 11월 23일, ‘재임 중 일어난 부정 비리에 대해 사죄, 전 재산을 국고로 헌납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현금 139억 원을 헌납하고 부부가 함께 강원도 깊은 산 속의 백담사에 은둔하였다. 거기서 2년간 어쩔 수 없이 유폐 생활하듯 들어앉아 있어야만 했다.일해재단은 몰수되고, 정부 싱크탱크는 ‘세종연구소’로 개칭 되었다.재임 중 그 누구보다 서슬 시퍼렇던 전 대통령은 89년 12월 31일, 국회의 5공 비리 조사 특별위원회의 청문회에 증인으로 세워졌다.야당 의원으로부터 125항목에 걸친 엄격한 질문 공세와, 물 잔의 물세례를 받는 굴욕도 맛보았다. ‘당신은 악마야’ 라는 고함이 청문회에 울려 퍼지기도 했다.90년 12월, 백담사의 칩거 생활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온 그는 세간의 눈을 피해, 조용하게 숨어 지냈다.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결말이 난 것은 아니다.영광의 권좌에서 오욕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파란만장한 드라마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정권의 평화적 교체
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했다.김영삼 정권은 95년 10월,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밀 자금을 적발해 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의 12·12 사태 책임과 재임 중의 부정 축재를 들어 체포 수감하였다.김영삼 정권은 전 대통령들을 처단하기 위해, 소급법을 제정하여 과거의 행적을 추궁하였다. 재판에서 전두환 피고측은 ‘광주 유혈 사건은 계엄령을 위반한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 이며, ‘부정 축재는, 정치 자금으로서 재벌들에게 헌납받은 것으로, 이는 역대 정권의 관행이었다’고 항변하였다.법정은 제1심에서 전두환에게 사형과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했다. 노태우에게는 징역 22년 6개월에 추징금 2,628억 원의 판결을 내렸다.97년 4월, 대법원의 최종 판결에서 전두환에게 무기 징역, 노태우에게 징역 17년이 확정되었다.
추징금은 감액되지 않은 원심 그대로의 판결이었다.최종 판결이 내려진 8개월 후인 97년 12월, 두 사람은 대통령 특사로 출옥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타산에 의한 것이다.전두환은 출옥을 하면서 보도진에게 ‘머리를 식히기엔 좋았다. 하지만 두 번 다시 들어올 곳은 못된다’는 농담을 던지며 여유작작한 태도를 보였다.여론은 ‘부정 축제에 대해, 반성의 기미가 추호도 없다’며 비판하였다.전두환은 석방 후 불교에 심취하여 조용하게 지내고 있다. 정부는 전두환에게는 추징금의 14%인 313억 원, 노태우에게는 66%인 1,741억 원을 징수했는데, 그 이상의 강제 집행은 불가능해 잔액은 2001년 4월 시효가 소멸되었다.대통령 전두환의 유일한 업적은 ‘독립 이후 한번도 없었던 정권의 평화적 교체’의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이승만을 비롯한 역대 대통령 4인은 모두 임기를 다하지 못하고 도중에 물러났다. 전두환은 대통령 취임에 즈음하여 ‘반드시 정권의 평화적 교체를 실현시키고 퇴임한다’고 공언하였다.
여당 내의 정권 돌리기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대통령 자리를 평화적으로 교대하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그러나 부정 축재로 대통령의 권위와 명예는 흙투성이가 되었다. 게다가 광주 유혈 사건의 빚도 있다.전두환은 개인으로서는 보스 기질을 타고난 데다가 배려 깊고, 잘 베푼다는 등의 장점이 있었다. 털털하고 걸쭉하면서도 유머감각 있는 입담과 거침없는 활달한 성격으로 상당한 흡인력을 지녔다. 그래서 사람도 많이 모였다.그러나 공인으로서, 대통령으로서는 비전이 부족하다. 박정희 개발 독재의 모방자에 지나지 않는다. 영남 군벌의 2대째로서, 박 대통령 암살의 보복을 이유로 숙군 쿠데타(12·12사태)를 결행, 권력을 잡았다.그를 일컬어 역사의 톱니바퀴를 역회전시켰다고들 한다. 그러나 역회전시킨 것은 아니다.
톱니바퀴 회전의 타성을 막지 못한 것이다. 그의 정치 운영은 한국의 민주화 진전을 늦췄다. 그러나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전두환은 재임 중, 통치 자금을 모으고, 재벌과 공공연히 유착하여 정권의 도덕성을 훼손하였다. 그 전통은 다음 정권에도 이어져 갔다.그러나 국민들 사이에서는 인간 전두환의 평가가 추정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렇게 나쁘지 않다.역사의 평가와 현재의 인기는 다르다. 특히 후임인 노태우에 비교해, 배포 있고 아량 있고, 손도 크며 인정이 많고, 리더십이 있다고 평가한다.그것은 공사 혼동을 미덕으로 착각하는 동양적 발상으로 연관된다. 일본에서의 타나카 가꾸에이와 상통하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