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권 , 문민 과도기 충격완화 역할

2004-06-16      
빛 발한 외교와 부정부패
한국 대통령으로서 여섯번째 인물, ‘제13대 대통령 노태우’는 소프트 스마일의 ‘보통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친근감 있게 등장하였다. 강경한 모습의 전임자와 대조적인 스타일은 한국인에게 신선한 이미지로 비춰졌다.노태우는 군벌 정권이 문민정권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에서 쇼크 업서버, 즉 충격 완화제가 되어 쿠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그런 점에서는 그의 온화한 이미지와 딱 맞는 적역이다.노태우는 시민 사이에서 고양된 민주화 요구에 직면, 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접 선거제 채택 등의 민주화를 선언하고 정면 돌파에 성공했다. 16년 만에 실시한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정부 통제 아래에 있었던 매스컴도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다.

대통령 직접 선거는 막대한 선거 자금을 쏟아 붓는 금권 선거가 되었다. 그 후 이것이 대통령 선거의 한 패턴이 된다. 선거 자금 조달에 관련되는 ‘원죄’가 정권의 족쇄가 되는 것은 뻔한 일이다. 이래서는 정경유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노태우는 대통령 취임 후 전두환을 산사에 칩거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민심 끌어안기에 나섰다. 더군다나 ‘야대여소‘정국이다. 전두환과의 과거 관계에 머뭇거려 망설일 여지가 없었다. ‘친구간의 의리’에 대해 생각하기에는 국민의 여망이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강했다. 노 대통령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책임 추궁, 전두환 정권의 비리 부정 단죄 등등, 이른바 ‘5공 비리 청산’을 단행하였다. 5공이란 제 5공화국을 말한다. 5공 청산에 대해 야당은, 철저히 파헤치지 못해 미적지근하다는 불만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불만족하나마 일단은 이해하였다.노태우는 이렇게 국민의 뜻에 머리를 굽히면서 차기 정권에서 예상되는 보복의 두려움을 잘라 버렸다.

문민 정권이 출현하기 전에 신군부 정권 시대의 때를 벗긴 것이다.야대여소 정국과 숙성한 시민 의식이 노태우가 가야 할 길을 지정해 준 결과였다.노태우는 조금씩 민주화 조치를 추진하여, 사실상 문민 정권이 발족되기 전에 민주주의 룰을 상당 부분 정착시켰다.5공 청산 후, 여당인 민정당은 민주당(당수 김영삼)과 공화당(당수 김종필)을 끌어들여 보수 3당을 합하였다. 이렇게 해서 노태우는 보수 세력을 결집, 원내 다수의 안정선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3당 합당은 이념도 지조도 없는 당리당략에 따른 야합이었다. 게다가 김영삼은 영남, 김종필은 충청도를 지지 기반으로 한다.김대중을 지지하는 호남세력과 비호남 세력의 대립은 3당 합당으로 격렬해졌다.노태우는 3당 합당으로 의원 내각제 개헌을 구상했으나, 김영삼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후계자 선택에서도 시종 애매한 입장으로 박태준과 김영삼을 저울질하였다.

그러나 김영삼에게 눌려 박태준을 버렸다. 이처럼, 여러 면에서 노태우는 더블 플레이어라는 비난을 받았다. 반면, 노태우 정권의 업적은 외교 분야에서 단연 빛나고 있다.올림픽 개최로 전세계에 코리아의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전방위 외교를 전개하여 소련, 중국과 국교를 수립했고 국제 연합에 북한과 동시 가입하였다.그렇지만 그의 북방 정책에 대해 ‘돈으로 산 졸속 외교’라고 혹평하는 경향도 없지는 않다.노태우는 재임 중에도 금전에 관련된 스캔들이 있었는데, 퇴임 후 거액의 부정 축재가 폭로되어 처단되었다. 이 한 건으로 노태우는 민주화와 북방 정책의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가장 평가받지 못하는 대통령으로 전락하였다.그는 왜 비극의 대통령이 되었는가? 그 사실을 구체화한다.

대통령 후보 수업까지 마무리
군인, 또 대통령으로서의 노태우는 주로 전임자 전두환과 양립하여 비교된다. 두 사람은 육사11기 동기생으로 둘 다 대구 출신으로 영남 군벌 혈통이다.성장 환경도 비슷해서 가난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노태우는 7세 때 부친을 잃고, 친척의 도움으로 대구 공업 고교에 입학했으나 4학년 때 경북고교로 전학하였다. 경북 고교로의 전학은 다가올 그의 앞날에 큰 의미를 차지한다. 박정희 시대, 패권을 잡은 영남 군벌 주류는 경북 고교 동창생이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구, 경북의 이니셜을 딴 이른바 TK인맥이다.노태우는 6·25전쟁이 시작되자 군대에 들어가 하사관 때 육사에 응시해 1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육사에서는 대구 공업 고교 동창인 전두환과의 교제가 돈독하였다.

노태우는 동기지만 한 살 위인 전두환을 형님으로 대우했다.임관 후, 정보 분야에서 시작해, 공수특전 여단장, 대통령 경호실 작전 차장보, 제 9사단장 등을 역임했다. 그도 하나회의 일원으로 박 대통령에게 총애 받던 한 사람이다. 노태우는 육군 참모총장 부관, 대통령 경호실 작전 차장보, 보안사령관 등의 자리에서 전두환의 후임이 되었다. 전두환이 12·12숙군 쿠데타를 계획했을 때, 노태우 소장은 서울 교외에 주둔하는 제9사단의 사단장이었다. 노태우 소장은 휘하의 제90연대를 동원, 국방부를 제압하였다. 그 공적으로 일약 신군부의 2인자로 떠올랐다. 그 직후 수도경비사령관에 보임됐다.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후에는 역시 전두환의 자리를 물려받아 보안사령관 자리를 차지하였다.전두환은 처음부터 정권의 평화적 교체를 선언하였다.

국민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차기 정권 계승자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불태웠다.노태우는 81년에 대장으로 퇴역한 뒤 바로 정무 제2장관에 임명됐다. 82년에는 서울 올림픽을 대비해 신설된 체육부의 초대장관을 지냈고 다음엔 내무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정치 현장을 순조롭게 익혔다. 83년에는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장으로 취임하여 국제적 인맥도 넓혔다. 85년에 여당 민정당 대표 위원을 맡아, 그 해 실시된 총선거에서 전국구 비례 대표로 국회에 들어갔다. 여기서 차기 대통령 후보로서의 수업을 총마무리하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