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장편소설 마지막 회

6장. 구명시식(救命施食)

2011-09-27      기자

사랑의 진실-3

“선원에 머물면서 이것저것 보고 들으면서 마음을 닦으세요.”

차법사는 윤정 영가를 쫓지 않고 선원에 머물게 했다. 오늘도 윤정 영가는 부러운 듯 영혼결혼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혼결혼식을 마친 차법사는 자리를 정돈하고 동참자들을 향해 춘향전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모인 사람 모두를 향해 하는 말이었지만 그 속에 낀 윤정을 향한 법문이기도 했다.

“만약 춘향이 끝내 이몽룡을 만나지 못하고 죽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
“원(怨)을 품었느냐 한(恨)을 품었느냐에 따라 달라졌을 겁니다. 원과 한이 같은 것 같지만 다릅니다. 한을 품는 것은 나쁜 건 아닙니다. 한은 에너지가 되어 더 큰 발전의 자극제가 되거든요. 그러나 원이 문제예요.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 하고 상대방을 원망하는 거예요.”

차법사는 윤정 쪽을 쳐다보며 계속했다.

“춘향이 죽으면서 다음 생에는 신분 차별 없는 곳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 살고 싶다고 소원한다면 이뤄질 가능성이 크지만, 변학도나 이몽룡을 원망한다면 원귀가 되어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랑은 전생의 흔적입니다. 마음껏 사랑하되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
“많은 분들이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랑을 얻을 수 있냐고요. 어떻게 하면 사랑을 얻을 수 있겠어요?”
“…….”
“달을 가질 수 있는 방법과 같습니다.”
“…….”
“저 높은 하늘의 달을 어떻게 딸 수 있겠어요. 딸 수는 없지만 담을 수는 있습니다. 맑은 호수에 달이 비추듯 마음이 맑으면 담을 수 있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어떻게 따 담겠습니까. 마음을 맑게 하면 담을 수 있습니다. 달을 갖고 싶다면 마음의 달을 가지세요. 사랑을 갖고 싶다면 마음의 사랑을 가지세요. 사랑을 가지려 하기보다 사랑을 마음에 담을 줄 알아야 싱글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혼을 볼 수 있느냐고 많이들 묻는데 답은 간단합니다. 영혼이 맑으면 자연스럽게 영혼을 볼 수 있죠. 맑은 영혼을 가진 자는 그래서 온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습니다.”

차법사는 윤정 영가를 볼 때마다 깊은 회의에 빠졌다. 인간의 운명을 뻔히 알면서도 이처럼 바꿀 수 없는 경우 차법사는 영능력자로서의 한계를 실감하기 때문이다.
영화 스크린 보듯 그렇게 지켜봐야만 하는 심정은 당사자가 아니고는 헤아릴 수 없는 그만의 고독이었다. 실패를 예상하면서도 그래도 해야 하는 일.
차법사는 요령을 흔들었다.

“땡그랑, 땡그랑, 땡그랑-”

종교는 없다-1

이번 가족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영단이 고함소리로 시끌벅적했다. 물론 차법사의 귀에만 들리는 영음(靈音)이었다.
이번 제주는 극심한 가정불화로 고통을 겪는 부인이었다. 부부는 부부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집안형제들은 형제들대로 반목의 반목을 거듭하고 있었다. 시어머니 영가가 영단에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러댔다.

‘제사 지내지 말라는데 아직도 제사를 지내느냐!’

생전에 고부 갈등이 심각했던 사이였다. 불교를 믿는 며느리에게 호통을 치는 이 시어머니는 살아생전 말년에 독실한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전통적인 대갓집 제사를 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아버지 영가는 며느리가 올리는 구명시식을 매우 흡족해하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남편, 즉 아들에게 불만이 많았다. 남편은 부인과 종교가 달라 오늘 구명시식을 극구 반대하기에 부인만 몰래 빠져나온 형국이었다. 그러니 할아버지는 제삿밥도 못 차리게 하는 장손인 아들이 얼마나 미웠을까.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서로 며느리 아들 편을 들며 영가의 몸으로 싸우고 있는 게 아닌가. 조상도 후손도 서로 얽히고설켜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한 명씩 힘겨운 설득이 시작되었다. 먼저 영가들의 불만부터 어루만져 주어야 했다. 생전에 영혼이나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시아버지 영가에게 물었다.

‘영감님, 제사를 안 지내는 후손에게 단단히 화가 나 계시네요.’
‘지들은 세끼 배불리 먹으면서 이렇게 버젓이 눈앞에 있는 나는 밥을 굶겨! 불효막심한 것들. 후손의 도리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것은 자식도 아니야.’

다음은 기독교신자였던 시어머니 영가였다.

‘왜 제사를 못 지내게 하시죠?’
‘제사는 미신이오. 귀신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할머니, 할머니는 지금 귀신이 아니신가요. 할머니가 영혼이잖아요.’
‘귀신하고 영혼하고 같다고?’
‘육신이 이미 죽은 지금 할머니는 그럼 누구시겠어요?’
‘나? 나는 지금 천국에 천사들과 같이 있지.’
‘그럼 영감님과는 같은 천국에 안 계신가요?’
‘영감은 지옥에 있다가 온 거겠지.’

할머니 영가는 퉁명스럽게 이유를 붙였다. 이를 듣고 있던 할아버지 영가가 소리를 쳤다.

‘뭐라고, 이 할망구야! 내가 지옥에 있다구. 제사를 안 지내 배가 고플 뿐이지, 지옥은 무슨 지옥이야!’
‘자, 자 두분 진정하세요. 여기까지 와서 후손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글쎄, 이 할망구가 자긴 천국이고 나는 지옥에 떨어졌다잖아. 생전에도 나만 죄인이라고 하더니, 이번엔 죽어서도 같은 하늘나라에 있으면서 자기만 천국에 있대. 괘씸한 할망구 같으니라고.’
‘할머니, 거기서도 종교가 있나요?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만나보셨어요?’
‘그건……아직 못 만나봤지만…… 분명 목사님이 그러셨어. 죽으면 하느님 계신 천국에 간다고.’
‘그럼 스님이 저승에는 부처님도 있다고 하면 있게 되는 건가요?’
‘하느님하고 부처님하고 어떻게 같이 있어. 말도 안 되지.’
‘할머니, 그럼 거긴 누가 사나요?’
‘이승에서 온 영혼들이 있지.’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나요?’
‘글쎄, 아직 못 본 건가? 혹시 내가 천국에 못 가고 지옥에 와 있는 거 아니야. 저 영감탱이와 같이 있는 게 좀 수상해. 내가 지옥에 떨어진 겐가?’
‘할머니, 하늘나라에 종교가 있다면 이 구명시식은 어떠한 종교이겠어요?’
‘…….’
‘이렇게 종교가 서로 다른 여러 영가들이 한꺼번에 모여 이승과 저승에서 의사교환을 할 수 있는 이 자리가 무슨 종교겠냐구요?’
‘그러게? 구명시식은 하느님이 하는 거요, 부처님이 하는 거요?’
‘할머니, 직접 계시고 경험해보시구서도 모르시겠어요?’
‘그럴 리 없어. 분명 내가 벌을 받고 있는 게야.’

할아버지 영가가 가슴을 치며 나무랬다.

‘이 할망구가 아직도 똥고집이야.’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후세계가 있는지, 영혼이 있는지, 천당과 지옥이 있는지 하늘나라에 간 영가들이 직접 확인하면 될 터인데, 죽어서도 영가들은 살아생전 습관 그대로 고집하고 있었다.
죽음에 대해 가르쳐야 할 종교에서 오히려 잘못 된 정보를 제공하여 영계를 혼동으로 만들고 있었다. 종교는 오랜 전통문화이기에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지만, 매번 부딪혀야 하는 차법사로서는 그때마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 제 말을 잘 들으세요. 종교는 사랑이고 자비이고 배려인데, 지금 온 집안이 종교 때문에 불화가 생겨 있습니다. 종교란게 있을까요?”
“…….”
“종교적인 삶이나 과정만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런가요? 어려운 말씀이신데요.”
“좋아요. 부처는 믿는 예수를 믿든 알라를 믿든 이것저것 다 떠나서 죽을 때 자기가 선호하는 신을 믿고 의지하려는 건 나쁜 게 아니죠.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면 좋은데, 죽으면서 자기가 믿는 신이 자신을 살리는 기적을 행해 줄 거라는 집착, 생전에 얻은 사후지식을 고집하는 집착을 해서 구천을 헤매는 겁니다. 이것이 문제지요. 종교나 사후세계 지식이 없는 사람이 오히려 집착이 없어 잘 죽습니다. 잘 살아야 잘 죽고, 잘 죽어야 잘 태어나고, 잘 태어나야 잘 사는데 말이죠.”
“그럼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하죠?”
“절충을 해야죠. 할머니 제사에는 꽃만 바치고 묵상하고, 할아버지 제사엔 음식을 차리고, 번거롭지만 명절 차례엔 두 분 상을 따로 마련하세요.”
“네? 젯상을 따로 보라구요.”
“번거롭지만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차례 때마다 망자의 상마다 차림이 다른 희귀한 장면이 연출되어야 하다니 부인은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후손이 피할 수 없는 조상의 업보였다.

“제사는 그렇다 치고, 추석과 설 차례는 어떻게 하지?”

차법사는 부인을 타일렀다.

“제사도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것이니, 당사자들이 좋아하는 데로 올리는 게 제사의 뜻을 받드는 거지요. 할아버지 할머니의 뜻이 각각 다르니 절차예식을 고집할 게 아니라 당사자들이 원하는 형식에 따르면 문제없을 겁니다. 남편도 그래요. 자기가 믿는 대로 믿게 하세요. 종교란 마루 종(宗)에 가르칠 교(敎)입니다. 가장 으뜸 되는 가르침이란 뜻이죠. 어차피 정상으로 가는 길은 많으니까요.”

산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다. 정상을 향한 등산로는 많아도 결국 하나의 정상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편견이 없는 곳에 도달하게 하는 게 종교의 궁극적 가르침이었지만 산 자나 죽은 자나 자기가 걸어온 등산로만 유일한 길로 생각하는 데서 분쟁이 발생하고 있었다.

차법사는 가무악단에게 영가를 위로하는 노래를 신청했다. 할머니에겐 찬송가를, 할아버지에겐 농부가 타령을 들려주며 마음을 달랬다. 서로 종교가 다른 집안에서 벌어지는 한편의 코믹 시트콤이었다. 찬송가, 염불, 타령이 같이 하는 이 구명시식 자리. 이 자리만 잘 봐도 인간에게 종교의 의미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는 터인데. 아쉬움을 떨어내듯 차법사는 요령을 힘차게 흔들었다.



영단에 40살이 넘은 아주머니가 나와 절을 했다. 아주머니는 고개를 숙이고 차법사를 바라보며 다음 의례를 기다렸다.

차법사는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 무언가 한참 생각하였다. 피곤한 듯 두 손으로 얼굴을 세수하듯 쓰다듬었다. 글로 쓰는 교문을 전하지 않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최여사님, 솔직히 말해보세요. 최여사님 하자는 대로 하겠습니다.”

“무얼…….”

최여사는 말끝을 흐렸다.

“친정어머니가 비록 치매이시지만 좀 더 사시는 게 좋겠어요, 아니면 몇 주만 정신이 말짱하다가 가시는 게 좋겠어요?”

최여사는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그러데 치매가 심했다. 변을 아무데나 보고, 남편에게 욕을 해대자 부부관계까지 소원해졌다. 수발을 하느라 집안은 말이 아니었다.

이상한 건 노인 요양원에 보내면 정신이 돌아와 말짱했다가도 집에만 데려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하는 것이었다. 비용이 만만치 않아 계속해서 요양원에 맡길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신세타령을 하다가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다.

“글쎄요…….”

최여사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힘든 결정이었다. 그저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겠지’ 하며 버티다가도 속을 뒤집는 봉변을 당하면 솔직히 ‘이 노인네는 죽지도 않나’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선 그냥 치매가 아닙니다. 또 다른 영가가 들어와 있습니다.”

“빙의란 말씀인가요?”

“그 영가를 쫒아내는 순간 어머니는 돌아가십니다.”

“…….”

최여사는 참으로 곤란했다. 여러 동참자들이 듣고 있는데, 차마 어머니가 죽기를 바란다고 할 수는 없었다. 차법사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최여사에게 충고를 했다.

“그 영가도 알고 보면 최여사님의 업보입니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고 언젠가는 또 다른 업보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끔은 온전한 정신이 돌아오는 어머니를 위안 삼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잘 결정하세요.”



이런 경우는 종종 있었다. 얼마 전에도 술만 먹으면 때리고 살림을 부수는 남편이 술을 끊게 해달라고 찾아온 아주머니도 그랬다.

남편은 평소엔 멀쩡했지만 술만 먹으면 행패를 부렸고, 술이 점점 늘어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그러나 차법사가 보니 사람이 술을 먹는 게 아니라 술이 술을 먹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 다른 술 취한 영가가 들어와 술을 먹게 하고 있었다.

구명시식 초기에는 그런 빙의영가를 쫒아내려고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능사가 아니었다. 빙의도 일종의 과보로 인한 인연이었다. 과부가 되어 펼쳐질 아주머니의 인생이 행복하리란 법도 없었다. 그렇게 죽은 남편의 영가까지 덧입혀진다면 아주머니는 세상을 원망하며 살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된 고통을 당하더라도 생명이 오가는 문제만큼 더 절박한 건 없었다. 산 자의 생명만큼 소중한 것도 없지만 자살자들은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착각을 범하고 만다.

육신의 고통을 피하면 편해질 것 같지만 고통은 육신이 아닌 자기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육신마저 없다면 그 고통을 개선할 미래도 방패막이도 없어지기에 더 큰 절망에 사로잡힌다는 사실을 모르고 저지른 큰 죄였다.

“최사여님, 제 말 잘 들으세요. 최여사님께서 자신의 전생과 업보가 무언지 무척 궁금하실 겁니다. 그러나 스스로 알지 못하고 남이 한 사람의 전생이나 미래를 함부로 입 밖에 내면 최여사님은 또 다른 과보로 더 크게 당합니다. 천기누설한 과보가 더해지는 겁니다. 한 인간도 한 우주이며, 인간의 신비가 곧 우주의 신비니까요. 그러니 이유를 묻지 말고 마음만 결정하세요.”

최여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알겠습니다. 살아계시는 동안 힘들더라도 잘 모시겠습니다.”

“잘 결정하셨습니다. 기쁜 순간도 내 인생이고 고통스런 순간도 내 인생입니다. 하루가 내내 고생스러운 건 아닙니다. 그리고 인생 공부한다 생각하시고 진심으로 ‘내 업보가 무언가’ 관찰해보세요. 씻김굿을 해드릴 테니 나중에 다시 부르면 나와 주세요.”

차법사는 다 같이 <부모은중경>을 외웠다. 아이가 태에 잉태하면서 9달 동안 온갖 고초와 태어나서 헌신하는 부모의 정성을 구구절절이 풀이한 일종의 타령이었다. 뒤이어 가무단의 <어머니 은혜> 노래에 최여사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흔히들 국가사나 인류사 같은 것만 천기누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차법사의 눈에는 국가나 인류란 허상이고 오로지 인간이 실상일 뿐이었다.

그런 한 인간이 평생을 경험하고 관조해야 할 과업을 발설해 버린다면 그보다 더 큰 천기누설의 과보는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침묵을 지켜야 할 때 차법사는 깊은 고독에 빠지곤 한다. 그래서 차법사는 4번 웃는다. 허상을 보며 웃고, 실상을 보며 웃고, 허상과 실상을 보며 웃고, 그런 자신을 보며 또 한 번 웃는 일명 ‘사소걸(四笑乞)’.



사랑을 어떻게 따 담겠습니까,
마음을 맑게 하면 담을 수 있습니다.

여러 사정으로 절반이 갓 지난 연재물을 중단하게 되어 송구스런 마음 거둘 길 없습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독자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연말쯤 단행본으로 출간예정이니 그때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김영수 작가]


그동안 [일요서울]에 연재해주신 김영 작가님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또한 소설 ‘구명시식’을 열독해주신 독자여러분께도 감사의 글을 남깁니다. 아울러 작가 김영님께서 독자 여러분을 연말께 찾아뵐 것을 알려오셨습니다. [일요서울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