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장편소설 제 54 회

6장. 구명시식(救命施食)

2011-09-20      기자

사랑의 진실-2

차법사는 윤정과 고궁을 묵묵히 걸었다. 머리가 아프다며 그녀는 잠시 의자에 앉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의자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더 높았다.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한 능수벚꽃은 짙은 분홍색 꽃망울을 아름답게 자랑하였다. 처녀의 젖꼭지처럼 바알갛게 부풀어 오른 벚꽃망울은 금방이라도 터질듯했다.

“저 벚꽃도 곧 아름답게 만발하겠죠?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왜 일주일만 피고 허무하게 떨어지는지 모르겠어요. 그나마 비라도 내리면 제대로 피지도 못하고 떨어져버리잖아요.”
“…….”
“법사님도 꽃이 영원히 피었으면 좋겠죠?”
“어제의 비에는 꽃이 피지만 오늘의 비에는 꽃이 지고 말지. 그렇다고 과연 피고 지는 것이 비 때문일까?”
“법사님은 또 선문답하시네요. 꽃이 영원히 피면 얼마나 좋아요. 신은 왜 영원한 꽃을 주지 않았는지 몰라요. 법사님도 꽃을 좋아하시잖아요?”
“나도 꽃을 좋아하지. 윤정씨는 왜 꽃을 좋아해?”
“글쎄요……저 싱싱하고 고운 빛깔이 너무 좋아요. 그래서 빨리 지는 게 너무 아쉬워요.”
“나는 저 꽃이 생명을 다해 폈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생각해. 혹독한 겨울을 이기고 생명을 다해 핀 꽃이기에 나도 생명을 다해 꽃을 바라보지. 그렇게 바라볼 때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꽃 자체가 아름답다는 말은 아니네요. 꽃이 바라보니 그저 바라본다…….”

그녀는 실망한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생명을 다해 핀 꽃……그렇게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는 꽃은 행복하지 않을까요, 법사님?”

그녀는 한 시라도 아까운 듯 꽃을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하지만 차법사는 꽃을 보기보다 그녀, 아니 그녀와 꽃 사이의 허공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차법사 눈엔 궁녀와 환관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옛날 궁궐의 장면이 사극처럼 선명했기 때문이다.

오직 차법사 눈에만 보이는 장면이기에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법사님은 어딜 그렇게 두리번거리세요. 숙녀를 옆에 두고 지금 한눈파시는 거예욧?”

그녀의 질책에 차법사는 허허 웃을 뿐이었다.
그녀는 어느 틈엔가 살며시 차법사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녀의 체온이 전해졌다. 머릿결에서 느껴지는 향기는 고궁의 그 어떤 꽃보다 향기로웠다.

“윤정씨,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차법사를 쳐다보았다.

“절 사랑하나요?”

뜻밖의 내 말에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돌리며 양 볼이 진달래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아니, 그 절 말고, 수행하는 사찰, 절, 사찰을 좋아하냐구요?”

“네? 아이 참, 법사님도.”

그녀는 괜한 상상에 부끄러운 듯 말꼬리를 돌렸다.

“법사님은 남의 전생이 훤히 보이세요?”
“이제 일어날까. 해 지기 전에는 나가야지.”

차법사도 얼른 말꼬리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자못 심각한 표정이었다.

“법사님은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윤정은 무어라 생각하지?”
“…….”

차법사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만큼 푸르지 않았다. 한쪽에서 검은 구름 한 때가 뭉게뭉게 낮게 깔려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사랑은 필연이라고 생각해.”
“예? 필연이요?”
“사랑은 전생의 흔적이거든.”
“전생의 흔적이요?”
“인연은 먼 시간에서부터 오는 거야. 큰 사랑은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흘러 전생의 흔적마저 뛰어넘지.”

그녀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였다. 차법사 눈에 갑자기 선명한 염사장면이 잡혔다.
“끼이익-쾅!”

순간, 차법사는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염사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소름 끼치게 생생했다. 윤정과 언니, 그리고 언니의 두 딸이 한꺼번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끔찍한 장면이었다. 다행히 윤정은 차법사의 움직임을 눈치 채기 못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아무 생각 마시고, 즐겁게 사세요.”

윤정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모르는 것은 단지 ‘언제’였다.
차법사는 그녀의 죽음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때부터 차법사는 해서는 안 될 구명시식을 하고 봐서는 안될 장면을 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윤정은 건강하고 아름다웠지만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죽음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차법사가 교통사고 장면을 미리 본 지 어느 덧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윤정은 서른둘이 됐다. 그동안 매해 윤정의 죽음을 미뤄달라 영계에 기도를 올렸다.
죽음으로 가는 사람의 명을 늘린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인지는 몰라도 차법사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결국 죽음 자체를 막을 순 없었다.
이번에도 또 한 죽음을 지켜봐야 하다니. 그해에도 윤정은 정성들여 연하장을 보내왔다.

“법사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영원히 곁에서 법사님을 돕고 싶어요.”

그때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러나 해가 바뀌고 1994년이 되자, 영계에서 최후통첩이 날아왔다.

“차법사. 그만큼 수명을 연장한 것도 고마워할 줄 모르는 것이 인간이오. 그렇게 수명이 연장된 인간이 살면서 한 일은 무엇이고 변한 건 무엇이오. 이건 미련일 뿐이오.”

영계에서 들여온 목소리는 단호했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었다.

“그래도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영혼을 천도하는 구명시식을 행하는 영능력자가 죽어가는 생명을 손 놓고 구경할 수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습니까.”
“차법사, 더 이상은 안되오. 영계에서 당신에게 생명과 우주법계를 컨설팅할 자격을 준 것은 틀림없소. 그러나 이건 과한 것이오. 자칫 육계와 영계가 혼란에 빠질 수 있소. 인간이 한 우주이고, 그 한 우주가 흔들리면 우주법계 전체가 흔들리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소. 생명이 우주인 것을 모르는 것이 인간들이오. 아무튼 이번 예정된 날짜에 거두어갈 것이니 그리 아시오.”

영계로부터 마지막 통보를 받은 차법사는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다. 피가 말라 도저히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 날 차법사는 미국의 뉴저지 선원에서 윤정을 살리기 위한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하루, 이틀, 그리고 보름. 차법사는 영계와 감응이 시작되었다.
그래, 이대로라면 윤정을 살릴 수 있겠다! 촛불의 불꽃이 높게 솟아올랐다.
그때였다. 기도가 막 정점에 이르려는 순간이었다.

“법사님! 생일 축하드려요.”

평소에 들르지 않은 도반들이 깜짝 생일 파티를 연다고 예고 없이 선원에 들이닥친 것이다. 촛불이 쓰러졌다.

“아!”

차법사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실패로 끝난 기도. 너무 기가 차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윤정이가 죽겠구…….’

그 시간 도시 외곽의 도로.

“끼익- 쿵!”

질주하던 자가용 한 대가 약간 굽은 도로에서 빙판길에서 미끄러지면서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긴 반원을 그리며 나무와 충돌하고 말았다. 이 사고로 3명이 즉사하고 운전자는 크게 다쳤다. 윤정의 형부가 몰던 차에는 윤정과 윤정의 언니, 그리고 언니의 딸이 있었고 즉사하고 말았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얼마 뒤 미국으로 하나의 우편물이 도착했다. 교통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인 윤정의 형부가 보내온 윤정의 일기였다. '생전에 윤정이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일기장을 법사님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라고 적힌 윤정 형부의 메모. 어떻게 형부만이 생존할 줄 알았을까. 이 메모를 전하기 위해 형부만이라도 구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죽으면 끝이 아니다. 그녀는 영가의 몸으로 선원을 오가며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차법사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이승을 버리지 못한 중음신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