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장편소설 제 52 회

6장. 구명시식(救命施食)

2011-09-06      

병(病)의 기원-3

“병이 낫는 게 소원인가요?”
“아닙니다, 법사님. 이 병은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압니다. 좀 더 오래 살려달라는 염치없는 부탁은 할 수 없지요. 단지 죽는 날까지 고통을 덜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고통이 엄습할 때면 극단적인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자식을 둔 어머니로서 차마 자살을 감행할 수는 없었어요.”
“의학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을 어떻게 제가 할 수 있겠습니까?”

차법사가 완곡하게 거절하자, 그녀는 절실하게 애원했다.

“저는 법사님을 믿습니다. 저는 영혼의 존재를 믿습니다.”

애절한 마지막 부탁에 최선을 다해보기로 마음 먹고 마침내 구명시식을 올렸다. 그녀 주변에 수많은 영가들이 나타났다. 그녀가 근무하던 병원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영가들이었다.
4개월 후, 그녀는 조용히 떠나갔다. 그녀가 남긴 일기장을 통해 구명시식과 투병기록이 고스란히 외부에 알려졌다. 거기에는 분명 그녀의 소원대로 고통 없이 떠나는 매일의 기록이 적혀 있었다. 이를 읽은 동료의사들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웅성댔다.
그러나 어쩌랴. 이유는 누구도 설명할 수 없으니. 다만 현상은 분명히 있는 것을.
여의사는 차법사의 말을 심각하게 듣고 있었다. 차법사의 말이 이어졌다.

“사람은 태어나면 언젠가 죽게 되어 있습니다. 태어난 게 병이 아니듯 죽음도 병이 아닙니다. 의사란 결국 생사와 싸우는 게 아니라 질병과 싸우고 있는 게 아닐까요?”

여의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왜 그런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을까. 왜 의학서적에는 그런 설명이 없었을까. 살리는 것이 의사의 최고 덕목으로 여기던 여의사의 신념의 한 벽이 허물어져 내렸다.
인간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최고의 엘리트인 의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또 다른 거대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웠다. 이제 중환자실 의사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는 환자들에게 무작정 생존의 희망을 주기보다,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마음 편하게 해주라는 말씀이죠?”
“여기 오신 영가들은 제가 최선을 다해 천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법사님. 그런데 제가 평소 의사로서 가진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여쭤봐도 될까요?”
“네, 뭐지요?”
“병은 왜 생길까요?”
“…….”
“세상에 없던 병이 새로 생기는 게 너무도 이상해요. 학자들은 바이러스의 유전적인 변이를 설명하지만…….”
차법사는 10년 전 구명시식이 생각났다.
한 부인이 자폐증이 심한 자식을 구명시식에 데려왔다. 자폐증은 현대의학도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고 대부분 정신의학적 측면에서 치료를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구명시식을 올리자 영적 요인이 드러났다.
아이의 아버지가 암으로 죽어가면서 고통을 잊기 위해 계속 모르핀 주사를 맞아 결국 마약중독자로 죽었는데 이후 그 아들이 그러한 업(業)과 인자를 고스란히 받아 자폐아가 된 것이었다. 생로병사의 고통도 엄연히 자연의 섭리인데 이를 중독성 마약으로 피해가려는 인간에게 주어진 과보였다.
차법사는 아이의 아버지 영가를 불러 정성껏 위로하고 어머니에게는 부적을 하나 써주었다. 자폐아는 급격히 정상을 찾아갔다.
지금은 정상적으로 학업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어머니는 부적의 효험이라며 신주단지 모시듯 부적을 간직했다. 허공에 기도와 종이 위에 부적으로 현대의학이 규명하지 못한 병을 치료하다니 의학 입장에선 참으로 터무니없는 미신이었다.
하지만 차법사의 눈에 현실은 불가사의 투성이다. 예전에 일본의 유명한 의사가 은퇴하면서 기자들에게 충격적인 고백을 한 뉴스가 있었다. 병명을 알 수 없는 병까지 합하면 오진율이 50%가 넘는다는 것.
차법사가 여의사에게 물었다.

“환자가 무슨 뜻일까요?”
“환자는 아픈 사람 아닌가요? 병에 걸리거나 해서…….”
“한자로 환(患)을 잘 생각해보세요.”
“…….”
“마음이 두 개 잖아요. 즉 자기 마음이 아닌 마음이 또 있는 겁니다.”
“빙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빙의도 한 원인이 되겠지요. 하지만 어디 그뿐이겠어요. 짝사랑하는데 상대방이 몰라줘도 환자가 되잖아요. 그 원인은 수도 없이 많아요.”
“…….”
“제가 보기엔 육신의 병은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혼이 육신을 지배하듯, 병원(病源)도 영적인 원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상념(想念)이 물질을 생성하는 거지요. 광우병 보세요. 인간의 무리한 욕심이 초식동물에게 육식 사료를 주어서 생겼잖아요. 결국 인간의 뇌를 파먹게 하고…”
“의사인 제가 그런 걸 생각지 못했다는 것이 참 부끄럽네요. 왜 학교에서 그런 걸 안 가르치죠?”
“강한 수사자 한 마리가 무리 암컷을 모두 차지하듯, 자연의 생명은 철저하게 강자를 선발하여 대를 잇고 있지요. 인간의술의 발달로 인해 질병을 치유하고 생명은 연장되고 있지만, 약한 유전자가 도태되지 않고 누적되어 세대가 갈수록 예전에 없었던 질병이 발현되고 있는 게 아닐까요.”
“…….”
“각종 현대 희귀질병의 근원이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의 선발방식과 맞서고 있는 현대의 첨단의학인 셈이지요. 천형(天刑)이라는 질병도 결국 인재(人災)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의술은 인술이어야 하고, 인술은 몸뿐 아니라 마음도 치료해야겠지요. 결국 의통이란 원혼을 달래는 겁니다.”

여의사도 서양의학에서 인간은 영체로 이루어진 엘러멘터리에서부터 질병이 기원한다는 논문을 본 적이 있으나 샤먼적인 치료술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현장을 본 이상 여의사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차법사는 가무악단과 함께 염불을 외며 영가들이 좋은 곳으로 가길 기원했다. 여의사는 차법사에게 합장을 하고 물러갔다.
그런데 갑자기 여의사가 자리에 돌아가다 말고 요령을 들려는 차법사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예상 밖의 질문을 던졌다.

“법사님, 저는 언제 죽을까요?”
“네?”
“그래야 저도 준비를 할 게 아녜요? 의사로서 남들보다 먼저 알면 안 되나요?”

차법사는 웃음을 참으며 타일렀다.

“인생에서 병은 약입니다. 언제 죽을지 몰라서 사는 동안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는 겁니다.”

물러가는 여의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법사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애써 참고 요령을 흔들었다.


삼생(三生)을 못 이룬 처녀와 총각의 한-1

차법사의 지시에 갑자기 선원이 분주해졌다. 가무악단과 의식 진행자들이 무언가 꺼내더니 선원 바닥에 늘어놓고 화려한 종이꽃도 장식했다. 동참자들은 무슨 영문인가 싶어 고개를 길게 빼고 눈만 끔벅였다.

“지금 영혼결혼식을 준비하는 겁니다. 영혼도 육신만 없다뿐이지 보고, 느끼고, 배고프고, 사랑을 합니다. 얼떨결이지만 여러분이 하객이 되어 젊은 두 남녀를 축하해 주십시오.”

남녀 영가의 부모들이 앞으로 나왔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아들, 딸을 졸지에 잃은 슬픔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게다가 처음 해보는 특이한 행사라서 그랬는지 양가 식구들은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삼천세계의 만유를 주재하시는 대원본존 지장보살의 가피력에 따라 영가의 영혼결혼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옷맵시를 고치고 자세를 가다듬는지 부스럭대는 소리가 뒤쪽에서 들렸다. 두 영가의 사진이 불단 아래 향로 위에 나란히 놓여졌다. 차법사는 지장보살을 명호하며 법단으로 다가갔다. 밝은 웃음을 짓고 있는 신랑과 새초롬한 표정의 새색시 사진이 한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기에는 두 사진 모두 밝은 분위기의 썩 잘 된 사진이었지만, 차법사 눈에는 두 사람의 운명적인 우수가 서려 있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죽기 전 차법사를 만난 적이 있다. 보기 드문 미인인 그녀는 핏기가 없는 하얀 얼굴로 애써 웃음을 지으며 찾아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