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장편소설 제 45 회

6장. 구명시식(救命施食)

2011-07-19      기자

이리하여도, 저리하여도 옳지 아니하다-2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이익 되다…….”

이 자리는 지옥문을 지키며 모든 지옥에 떨어진 중생이 모두 나올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장엄한 서원의 가피를 받은 자리임을 알렸다. 독경이 끝나자 차법사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세 사람은 법복을 입은 차법사를 그때 처음 보았다. 변신한 외모처럼 평소 차법사와는 딴판이었다. 묵직한 바위와 같은 중압감이랄까.
순간 용화의 숨이 턱 막혔다. 누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용화는 무슨 일인가 싶어 아득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차법사에게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기감일까.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지천태도 등골이 써늘해졌다. 뭔가가 시작된 듯 한 직감이 들자 바짝 긴장했다.
구명시식에 등장한 차법사는 더 이상 수더분한 이웃집 쌀집 아저씨가 아니었다. 눈은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 스기로 번득거렸다.
영단 앞에 잠시 머물던 차법사가 붉은 방석 위에 정좌했다. 어둠속에 등대가 강한 불빛 기둥으로 암흑을 가르듯 그의 눈빛은 참석자들의 마음을 빠짐없이 꿰뚫어보고 있었다.
기에 둔감한 조기자조차 차법사의 알 수 없는 강력한 기운에 오금이 저렸다. 좌중은 차법사의 기운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지천태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는 건가?’

책을 통해 구명시식 이야기를 많이 접했지만 막상 현장에 앉아 있으려니, 할 일 없이 이렇게 앉아만 있어야 하는 것인가 싶어 약간 당혹스러웠다. 차법사가 동참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파도와 맞서지 말고 물결치는 대로 같이 하면 됩니다.”

지천태는 차법사의 말에 아랑곳 않고 머릿속으로 혼자 생각했다.

‘영가는 어디 있는 거지?’
“가장 가까이 있는 속눈썹은 안 보입니다. 영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가 영가이기 때문입니다. 안 보인다고 없는 게 아닙니다.”

지천태는 차법사의 응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라, 마치 내 생각을 읽는 것처럼 말을 하네? 우연의 일치인가?’
“큰 눈으로 보면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게 필연이지요. 단지 모두 알 수 없기에 불가사의라고 합니다. 까마귀가 모두 검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흰 까마귀 하나면 족하지 모든 까마귀를 다 확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편 조기자는 영단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영가가 눈에 보일까 싶어서였다.

‘차법사는 대체 어떻게 영가를 본다는 거지? 안 보이는 데……. 그의 말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이때 차법사의 음성이 들렸다.

“그렇다 그렇다 하면 그런 것이요, 아니다 아니다 하면 만사가 허사로다.”

용화는 머릿속을 뒤져 영혼에 대한 지식을 떠올리고 있었다. 경전에는 사람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넋)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 신이 되어 제사를 받다가 4대가 되면 영(靈)도 되고 선(仙)도 되며. 백은 땅으로 돌아가 4대가 되면 귀(鬼)가 된다고 되어 있었다. 구명시식에 등장하는 영가는 영인지 귀인지 궁금했다.
이에 차법사는 선시(禪詩)로 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달의 사진은 달이 아니다.
신이라는 단어는 신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언어는 사랑이 아니다.
어떠한 언어에도 생(生)의 신비가 내포될 수는 없다.
지식이라는 것은 언어, 언어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지식이란 커다란 환상일 뿐이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은 다 님이다.
그러나 님은 이름 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당신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당신의 그림자니라.”
‘누가 쓴 시지? 이런 자리에선 차라리 염불이 적격 아닌가? 다른 사찰의 초혼의식은 이러지 않는데…….’

이런 용화의 생각에 차법사가 응답했다.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세요.”
차법사는 또 다른 선시를 읊었다.

“고요한 달밤에 거문고를 안고 오는 벗이나,
단소를 손에 쥐고 오는 이가 있다면
굳이 줄을 골라 곡조를 아니 들어도 좋다.
이른 새벽에 홀로 앉아 향을 사르고,
산창에 스며드는 달빛을 볼 줄 아는 이라면
굳이 불경을 아니 외워도 좋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한 물로 화분에 물을 적시며,
난초 잎을 손질할 줄 아는 이라면
굳이 화가가 아니라도 좋다.
저문 봄날 지는 꽃잎을 보고,
귀촉도 울음소리를 들을 줄 아는 이라면
굳이 시인이 아니어도 좋다.

구름을 찾아가다 바랑을 베개 삼아,
바위에 기대어 잠든 스님을 보거든
굳이 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다.
해 저문 산야에서 나그네를 만나거든,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 물을 것도 없이,
굳이 오가는 세상사를 들추지 않아도 좋다.”

‘그나저나, 책에는 4대가 지나야 초혼이 된다고 되어 있는데, 4대가 안 지난 동곡 스승의 영가가 찾아올까? 상제님이 나타나시면 좋을 텐데…….’
“거짓 위(僞)자는 사람 인(人) 변에 위할 위(爲)자로 되어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다는 것은 거짓이라는 거지요. 오늘 이 자리 부모를 위해서, 친구를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스승을 위해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세요. 이 자리만큼은 자신을 위해 구명시식을 올리세요.”
‘음, 마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네.’
“오늘 같은 자리는 알아서 믿지 말고, 믿어서 알도록 하세요.”

용화는 차법사가 염력으로 소통을 하고 있는지 여전히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10명의 제주를 하나하나 점검한 차법사는 양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 외쳤다.

“이리하여도 옳지 아니하고, 저리하여도 옳지 아니 하니, 동가숙 서가식이로다. 넓고 넓으니 조금도 구애받음이 없고, 높고 높아 걸림이 없으니, 칠흑보다 더 어둡고 햇빛보다 더 밝도다. 얍!”

마지막 외마디 사자후에 좌중은 움찔했다. 움찔한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도 있었다.

“과연 이렇게 이승과 저승을 잇는 구명시식을 하는 게 옳으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구명시식을 하지 않는 게 옳으냐. 더더욱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동쪽에 가서 잠을 자고, 서쪽에 가서 밥을 먹는 신세입니다.”

그랬다. 동전의 양면처럼 물질계는 영혼계를 볼 수 없고, 영혼계는 물질계를 인지할 수 없다. 구명시식처럼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일은 차원(次元)의 질서를 거스르는 금기 중의 금기다. 그러나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 원한이 깊은 저승의 죽은 자는 침묵하지 않았다. 육신이 머물던 세계를 향해 처절하게 외쳐댔다. 물론 영계의 용인이 필요했다.
예불 스님은 어른 팔로 한 아름이 넘는 거대한 징을 들어올렸다. 차법사는 징채를 들고 말했다.

“영혼은 맑은 쇳소리를 좋아합니다. 그대로 마음으로 받아들이세요.”

차법사는 힘껏 징을 세 번 쳤다.

“부왕-, 부왕-, 부왕-.”

구명시식은 그 어느 법례집에 명시된 종교 절차와도 무관했다. 오직 당일 초혼된 영가들의 마음과 정서에 따라 형식은 급변하기 때문이다.
살풀이를 비롯한 영무(靈舞)가 추어졌다. 구슬프면서도 요염한 춤사위가 허공을 수놓았다.
소복을 입은 가무단의 처녀가 등장했다. 절제된 동작으로 손을 허공에 애타게 뻗치며 외쳤다.
“지장보살 땡그랑/ 땡그랑 땡그랑 땡그랑
어 너엄 어허 넘차/ 어가리 넘차 너화너……”

처녀의 만가(輓歌)는 초혼가(招魂歌)로 이어졌다.

“간다 간다 극락을 간다/ 염불 받아 이제 간다.
저 달 안 밝아도/ 대한 천지 다 비추네
극락가는 구천행로/ 깜깜해서 안 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