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장편소설 제 33 회

5장. 일수사견(一水四見)

2011-04-26      기자

조용한 경천동지(驚天動地)-2

“설사 정부가 소를 제기했다고 해도 지금과 마찬가지야. 국가의 소송도 불확실한데, 더욱이 민족회의는 접수 심사과정에서 폐기처분 당할 확률이 높습니다.”
“이차 저차해서 소가 진행되지 않는다면, 그럼 헛일 한 거란 말씀입니까? 해프닝인가요?”

지천태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조기자는 차법사를 제쳐놓고 해박한 지식을 뽐냈다.

“해프닝이라뇨. 큰 의미가 있습니다. 간도협약 100년 동안 피해자인 우리가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한 때가 한 번도 없다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100년이 가기 전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표시를 한 것에 의의가 있다는 겁니다. 만약 나중에 본격적으로 영토분쟁이 생겨 국제사법재판소에 정식으로 섰을 때, 우리가 아무 저항의 표시도 안했다면 스스로 간도를 포기했음을 시인한 셈이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매우 불리한 증거죠.”
“그럼 왜 국가는 그동안 가만히 있었죠?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 아닌가요?”

차법사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만국평화회의에 간 이준 열사도 법으로 따지자면 불법이지요. 그런데 지금 후손들에겐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 독립 의지의 표본이잖아요. 적어도 이번 건은 그런 시각에서 봐야하는 거 아닌가요?”
“…….”
“우리는 민주화과정에서 ‘반미’만 외쳤습니다. 하지만 우린 중국의 손바닥 안에 있어요. 2005년도 중국산 김치에서 기생충 알이 발견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온 국민이 중국김치에서 기생충 알이 발견된 사실에 분노했어요. 네티즌들은 짝퉁 저질 중국이라고 맹비난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그 이후론 조용하던데…….”

조기자의 궁금증에 차법사가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 정부가 중국 농산물에 대해 대대적인 검역을 실시한다고 발표하자, 중국은 정치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자체 검역을 핑계 삼아 항구에 자국 농수산 수출품을 잡아놓은 거지요.”
“…….”
“농산물은 모두 썩어 수출을 못했고, 그렇게 한 달이 흐르자 안달이 난 건 우리나라였습니다.”
“수출 못한 중국이 아니구요?”
“천만에요. 우리 먹을거리 물가가 폭등했어요. 중국김치를 쓰던 대부분의 식당들은 난리가 났고, 양념값이 폭등했어요. 왜냐하면 우리 식량자급률은 25%도 안 됩니다. 대부분 중국에 의존하고 있어요.”
“음…….”

좌중에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어떻게 한 줄 아세요?”
“…….”
“우리 정부관리가 중국 대사관에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어요. 그리고는 겨우 없던 일로 유마무야 됐죠.”

조기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참한 현실이군.”
“북한은 더합니다. 식량, 에너지에서 손 떼면 북한은 당장 정지됩니다.”

지천태가 혀를 끌끌 찼다.
“참담 그 자체네요. 남북 모두 중국에게 그토록 휘둘리고 있다니. 그러니까 중국이 그렇게 기고만장하죠. 이제 국혼 살리기에 왜 간도협약을 하시는지 백번 이해가 갑니다.”

조기자 목소리는 흥분되어 있었다.

“분노할 곳은 따로 있소. 기도 안 찬 건 영토분쟁 시한 100년은 법적 근거가 없다고 애써 의의를 폄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소위 지식인이란 사람들이 법적 효력이 없다느니, 시효 100년은 무의미하다느니…….”
“저, 저, 저런. 본인들은 행동하지 못하고 배 아프니 뒤에서 트집 잡는구먼. 정작 국제소송이 벌어져 봐요. 100년 동안 뭐했냐 하는 증거가 얼마나 중요한 증거가 되는데…….”
“적은 내부에 있다니까요.”

돌아가며 성토의 분위기가 한 동안 이어졌다. 조기자가 생각난 듯 물었다.

“형님, 경천동지할 일이란 게 이번 간도서류 접수한 거요?”
“왜?”
“9월이 가기 전에 일어난다고 했잖아요. 다른 건은 H그룹 모회장이 금강산 피격 사건이 나고 8월 16일 청와대 다녀온 일밖에 없잖소. 법사님 말 믿고 주식을 판 사람들이 난리요, 지금.”

H그룹은 대북 관광사업을 하던 대기업이었다.

“경천동지가 꼭 요란해야 되나. 모회장이 가져온 보따리는 판도라 상자야. 거기엔 북한 최고 통치자의 어마어마한 메시지가 들어 있어. 차마 공개하지 못할 획기적인…….”

차법사는 말꼬리를 흐렸다. 조기자는 그 꼬투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들에게 남북교류설을 강하게 부정했군. 형님, 그 메시지란 게 뭐간디요?”
“차차 밝혀지겠지, 뭐.”

차법사가 얼버무리려 하자 조기자는 싸움 개처럼 물고 늘어졌다.

“아따, 형님까지 이러기요? 천문도 천기누설이라 중간에 입을 꽉 닫더니만, 형님도 합죽이 행세를 하시네. 거시기 속 시원히 말 좀 해보소.”

조기자의 닦달에 차법사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고……정말로 경천동지할 일이야.......만약 북한의 제안을 남한이 거부할 경우…….”
“거부한다면……놈들이 전쟁이라도 벌이겠다는 거요?”
“궁지에 몰린 북한이 자존심 상해가며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었는데, 냉정히 거절한다면 북한의 선택은 좁아지는 거지.”
“선택?”
“북한의 경제는 어딘가에 의지하지 않으면 유지가 어려울 정도야. 그동안 남한의 햇볕정책이 봄날이었지. 그런데 이를 갑자기 끊으면 어떻게 되겠어.”
“중국만 바라보겠죠.”
“맞아. 문제는 중국이 단순원조에 그치지 않는다는 게야. 욕심을 내겠지.”
“그 떼놈들은 진작부터 북한을 지네 땅이라고 우깁디다. 동북공정 때부터 알아봤당께.”
“중국만 그런가. 미국은 전쟁무기 재고를 털어야 경제가 돌아가는 군산복합체 국가야. 중국이 더 크기 전에 미국은 자웅을 겨뤄야 하는 입장이지.”
“설마, 미국이 전쟁을…….”
“전에 말했잖은가. 금전(金戰)시대라고. 중국이 달러를 위협하는 한 미국은 더 이상 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거야. 역사는 돌고 도는 게야. 60년 전 미소강대국의 대리전을 벌인 6·25가 한 갑자 되는 해가 내년 경인년(庚寅年) 아닌가.”
“미·중이 싸우면 3차 세계대전으로 비약될 거라는 게 전문가들 중론인데.”
“그렇게 안 되도록 해야지……. 남북문제는 지구 운명의 문제가 걸려 있어. 그런 면에서 한반도가 지축이라는 거야.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
“…….”
“소리 없는 경천동지는 이미 시작됐어. 내년 경인년 내내 한반도에서는 살얼음판 걷는 위태위태한 남북대결과 강대국들의 대리 힘겨루기가 펼쳐질 것 같아.”

차법사는 허공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번개가 번쩍 치고 벼락소리는 한참 뒤에 들리는 경천동지라……. 그럼 간도소송은 진짜 경천동지가 아니오?”
“…….”

차법사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사실 간도 소송은 영토 욕심이 목적이 아니었다. 새로운 펼쳐질 세계에 대한 새로운 국가 개념의 발상이었다. 정치의 국경선이 아닌 문화 자치의 연방제. 차법사 눈에는 향후 펼쳐질 엄청난 격변이 펼쳐져 있었다.
용화는 옆에서 조용히 들으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한반도 정세와 미래가 이렇게까지 피부에 와 닿게 긴박하게 돌아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100일 구명시식은 천지를 바꾸는 천지공사란 말인가?’


언어가 끊어진 곳-1

차법사가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딱딱한 이야기 말고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조기자의 대꾸는 시큰둥했다.

“뭔 재미있는 이야기요?”
“제가 젊은 시절 이 절 저 절 만행하고 돌아다닐 때입니다. 극락암에 머물고 있었죠. 하루는 부산에 머물던 구산스님이 극락암의 경봉스님을 만나러 가야겠다고 했습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황금빛 도는 차를 한 모금 마신 차법사는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당시 통도사 극락암은 당대의 선지식 경봉의 선을 체험하기 위한 운수납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는 때였다. 잠시 구산스님 시중을 들던 차법사는 구산(九山)스님을 모시고 경봉(鏡峯)스님을 뵙기 위해 통도사의 극락암을 향했다.
그때만 해도 차법사는 수행의 길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모든 사물을 늘 깊은 관심과 통찰력을 가지고 파악하려는 탐구욕이 깊었기에 당대 쌍벽을 이루는 선지식들의 만남을 옆에서 지켜본다는 사실에 행장을 꾸리면서 흥분마저 느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