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장편소설 제 23 회
4장. 강증산의 유언
2011-02-15 기자
지천태(地天泰)의 등장-2
용화는 일어서서 정중히 인사를 나누었다. 차법사가 다른 두 사람을 소개했다.
“조편집국장, 아니 편하게 조기자라고 하겠습니다. 조기자는 내가 미국에서 생활할 때 늘 같이 있었고, 지천태 도인도 미국에서 만났는데 심지가 깊은 분입니다.”
지천태(地天泰). 이름부터 범상치 않았다. 지천태(地天泰)는 주역의 11번째 괘로 총 64괘중 가장 이상적인 괘에서 딴 일종의 호였다. 지천태란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모양으로 천지교태 소왕태래(天地交泰 小往泰來: 하늘과 땅이 합심하여 천지간에 있는 만물을 양육하니, 땅에는 백곡이 풍성하여 온 백성이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살아간다)에서 나온 말이다.
“저와 지선생이 만났던 인연을 말씀해주세요. 그 땐 참 재미있었죠?”
차법사가 지천태를 바라보았다.
“아, 그때요.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합니다.”
차법사와 지천태는 그때를 생각하며 아이처럼 마주보며 껄껄 웃었다.
지천태와 차법사의 인연은 미국 서부의 세도나 가는 길을 안내하면서 비롯되었다. 90년대 초 지천태는 국내 재벌그룹에 근무하는 엘리트였다. 당시 서른 중반을 넘긴 그는 결혼도 마다하고 도를 닦는데 열중했다.
국내에서 유명한 기수련 과정을 모두 이수하여 세간에 ‘도인’ 호칭을 듣던 그가 결국 휴직계를 내고 미국에 온 이유도 세도나에서의 기수련 때문이었다.
세도나(Sedona)는 영험하기로 소문난 기수련의 성지다. 미국 애리조나 주에 위치한 세도나는 과거에는 원주민인 나바호, 아파치, 야바파이 등 인디언 부족들의 성지이기도 했다. 세도나에는 반경 8Km안에 무려 5개의 거대 ‘볼텍스’가 몰려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볼텍스란 바로 극을 말하는데, 묘하게도 세도나(Sedona)를 거꾸로 읽으면 전류가 흐르는 표면 양극(Anodes)을 뜻하는 영어단어가 된다. 북극과 남극 이외의 지구 곳곳에는 기를 분출하는 21개의 강한 ‘볼텍스’가 산재해 있는데, 그중 5개나 이곳 세도나에 몰려 있었다. 강력한 에너지 장 때문에 나침반을 놓으면 N극(북극), S극(남극)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전자 장비들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근처 숙소의 모든 잠금장치는 구식열쇠가 대신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날 지천태는 우연히 뉴욕에서 만난 차법사 일행을 데리고 세도나 안내를 맡게 되었다. 차법사를 포함한 4명의 일행은 미니 밴을 몰고 애리조나 주의 세도나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었다.
미니 밴엔 차법사를 비롯해 3명이 타고 있었다. 운전석에 지천태, 조수석에 미스 김, 운전석 뒤에 미스 리와 차법사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뉴저지 출발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근래 보기 힘든 폭우가 쏟아진 것이다.
콰르릉-콰쾅-
벼락과 천둥이 허공을 가르고, 화살처럼 내리 쏘는 폭우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세도나는 꿈도 꾸지 말라는 누군가의 경고같았다.
“자, 저만 믿고 갑니다.”
주저하는 일행을 향한 차법사의 이 한마디에 밴은 장장 2700마일로 예상되는 거리를 망설임 없이 내달렸다.
뉴저지를 떠나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인디애나, 일리노이, 미주리, 오클라호마, 텍사스 주를 지나 그야말로 끝없는 사막인 뉴멕시코 주의 40번 고속도로 서쪽으로 서쪽으로 내달렸다. 세도나에 간다는 흥분감에 마치 축지법이라도 쓴 듯 달리고 또 달려 자지 않고 번갈아가며 운전한 결과, 이틀 만에 애리조나 주경계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건은 애리조나 주를 120마일쯤 남겨 놓은 지점에서 벌어졌다.
차법사는 불쑥 일행에게 알 수 없는 말을 던졌다.
“딱 10분만 입정 상태에 들겠습니다. 죽은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브레이크를 잡지 말고 달리세요. 잊지 마세요. 그냥 달리기만 해요.”
다들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차법사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죽은 듯 수면상태에 빠져 들어갔다. 다들 피곤해서 잠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분 뒤.
펑, 펑-
끼이익-
날카롭게 아스팔트를 긁는 굉음이 귀청을 찢었다. 앞에 달리고 있던 거대한 트레일러의 앞바퀴 2개가 커다란 굉음을 내며 연달아 터진 것이었다. 그 파편이 차 유리창 쪽으로 날아왔다.
!
세 명의 일행은 일제히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앞 유리가 박살나며 쇠파편이 누군가의 얼굴에 밖힐 건 뻔 했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일행은 어리둥절했다. 다행히 파편은 유리창 바로 위쪽 천장을 스치며 튕겨나간 것이다.
그러나 위기는 시작에 불과했다. 날아오는 파편에 놀라 지천태가 급브레이크를 밟고 기우뚱거리며 차선을 바꾸고 말았다. 돌발상황에 조금 전 차법사의 경고를 까맣게 잊고 말았다.
끼이익-
급정거하려는 순간, 밴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뒤따르던 육중한 버스가 굉음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흰색 버스가 허연 악마처럼 밴을 덮치는 순간이었다. 지천태는 실내 뒷거울로 그 상황을 생생하게 바라보았다.
‘아, 늦었어. 내가 신이라도 저 차를 정지시키기엔 너무 늦었어.’
세 명은 모든 걸 포기한 상태였다. 하지만 차법사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죽은 듯 의자에 기대 있었다.
그때였다. 지천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하얀 악마처럼 덮치는 그 버스가 눈에 들어왔는데, 차안엔 아무도 없었다. 앞좌석에 있어야 할 운전자도, 승객도 그 무엇도 볼 수 없는 텅 빈 차였다.
그 순간, 밴에서 무언가 흰 그림자가 그 하얀 버스로 달려들었다. 하얀 버스는 사뿐히, 깃털이 바람을 타고 떠오르듯 밴과 트레일러 사이를 미끄럼 타듯 빠져나갔다.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격한 일행들은 넋이 나간 듯 멍한 상태였다.
그때 또 한 번 차가 휘청했다. 앞서 펑크 난 트레일러가 휘청거리며 밴을 막아서는 순간 귀신처럼 앞으로 빠져나간 하얀 버스가 어느새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연쇄충돌 순간이었다.
세 일행은 이제 악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하얀 버스에 그대로 들이 받치는 순간, 일행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충격도 없었다. 죽은 것일까. 세상이 너무나 고요했다.
지천태가 눈을 떠보니 밴이 차선을 바꾸어 트레일러를 지나쳐 달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하얀 버스가 순간이동을 한 것일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몇 시간이 흘러간 듯 모든 것이 천천히 그리고 생생하게 느껴졌다.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일행은 아주 정말 짧은 순간이었지만 사색이 된 채 그저 휑한 동공만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법사님!”
그제야 생각난 듯 미스 리가 차법사를 흔들어 깨웠다.
“법사님, 일어나세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지천태가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차법사 몸에 냉기가 돌았다. 언뜻 보기에 죽은 사람이었다.
“법사님! 법사님!”
놀란 미스 리가 다급하게 차법사를 흔들었다. 지천태가 뒤를 돌아 손가락을 차법사 코에 대보니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얼른 손목을 잡아보았다. 다행히 맥은 뛰고 있었다. 그때 차법사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천천히 차법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눈을 떴다.
“오랜만에 한 유체이탈이었네.”
차법사는 마치 막 낮잠을 깬 사람처럼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지천태는 등골이 오싹했다. 지천태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심령과학이나 기의 세계를 다룬 책에서 유체이탈을 한 육신은 의식만 없을 뿐 숨을 쉬고 맥박은 그대로였는데 숨도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밴에서 빠져나가 하얀 버스를 밀어낸 게 차법사의 영혼이었단 말인가?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하얀 버스는 무엇이란 말인가?’
정차된 밴에서 멀리 고속도로를 바라보았다. 하얀 버스는 흔적도 없었다. 지천태는 혹시 백일몽을 꾼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미스 김과 미스 리도 하얀 버스 보셨죠?”
“물론이죠. 그 차하고 충돌하는 줄 알았는데…….”
그녀는 미처 버스 안 까지 살피진 못한 모양이었다. 어디까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차법사가 보는 사건의 전말은 일행과는 달랐다. 차법사는 애리조나 주에 들어서자 이미 유체이탈을 준비하고 있었다.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선가 낯선 영가가 일행의 차안에 쑥 밀고 들어왔다. 생전에 엄청난 사고를 당해 최후를 맞이한 듯 눈알 하나는 없고 온 몸은 피투성인 히스패닉계 영가였다. 차법사가 염력으로 외쳤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