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 : 영본시대 김영수 장편소설 제 6회
2010-10-12 기자
2장. 천지 도수(天地 度數)
증산이 남긴 유서-2
용화는 진본 성장공사도(誠章公事圖), 신장공사도(信章公事圖), 예장공사도(禮章公事圖)가 있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30여 점만이 전하는 현무경 중에 특히 그 석 점만은 다른 현무경과 달랐다. 납작한 가죽으로 만든 붓으로 여러 빛깔의 글씨와 그림을 겹쳐서 그리는 혁필화(革筆畵)였는데, 증산은 특이하게도 색을 넣지 않고 검은 먹만으로 그렸다. 글과 그림이 다른 현무경에 비해 대형일 뿐 아니라 매우 치밀하게 그려져 있다.
용화도 떠돌던 축소 복사판만 접했을 뿐 말로만 들어오던 진본 현무경은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친필 유서와 함께 있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용화는 번개를 맞은 듯 눈이 번쩍 뜨이고 막혔던 가슴이 뻥 뚫렸다. 용화는 즉시 골방을 박차고 나왔다.
봄이 왔다고 하지만 바람은 아직도 쌀쌀한 겨울인 3월초였다. 용화는 한 인물을 만나기 위해 금산사에서 원평읍 방향으로 하염없이 걸어 내려갔다. 푸른 물이 넘실대는 호수가 보였다. 모악산의 물을 가둔 농업용 원평 저수지가 내륙의 바다 같았다. 제법 쌀쌀한 바람에 넘실대는 물결이 가슴을 탁 트이게 했고, 멀리 호수 가운데는 물오리 떼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호수는 동곡마을로 통하는 입구였다. 근처에 동곡약방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증산이 천지공사를 보았다고 책에 나오는 약방이 아직도 실존하다니 신기하기만 했다. 스승의 이름 ‘동곡’도 여기서 딴 이름이었다.
용화는 약방 아주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마을 맨 위쪽에 있는 집을 찾아 올라갔다. 모악산 깊은 계곡에서 내려오는 도랑을 끼고 한참 올라가니 허름한 집 한 채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마을과 그리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마치 깊은 산속에 둥지를 튼 암자 느낌이었다.
“계십니까?”
반응이 없자 마당으로 들어서며 외쳤다.
“문홍 선생님!”
두 번째로 소리에 방문이 열리더니 키가 크고 눈매가 부리부리한 노인이 얼굴을 드러냈다. 노인의 눈매가 평범하지 않았다.
“무슨 일로?”
“문홍 선생님이 맞으신지요?”
“그렇소만, 어디서 오셨는지요?”
용화는 자초지종을 말하고 노인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방안에는 책장이 두어 개 있고 수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개중에는 용화의 눈에 익은 몇 권 눈에 들어왔지만, 처음 보는 책들이 더 많았다. 아마 증산관련 도서나 경전들은 모두 완비되어 있는 듯했다.
용화의 눈은 현무경과 유훈을 찾고 있었다. 깊숙이 숨겨져 있는 듯 그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아늑한 방안은 온화한 기운이 뭉쳐 있어 새둥지처럼 안락했다.
“그래 미륵 공부를 하려고 왔나요?”
문홍은 용화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듯 형식적인 말을 피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용화는 가지고 온 책들을 꺼내 놓았다.
“이 책들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요….”
“그래요? 허허….”
우물쭈물하는 용화를 보는 문홍은 입맛을 쩍쩍 다셨다.
용화는 현무경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문홍 선생이 그런 성스러운 물건을 호락호락 내놓을 성싶지 않았다.
사실 문홍은 용화의 방문 목적을 첫눈에 알아챘다. 이런 산골에 자신을 물어물어 찾는 이들은 백이면 백 현무경 때문이었다. 말은 친절했지만 문홍은 용화가 과연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심지를 재보고 있었다.
“이 공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연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인연이라면?”
“상제님과 인연이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문홍은 잘라 말했다.
“상제님이라뇨?”
용화는 엉겁결에 말을 되받았다.
“증산 상제님 말이에요.”
“….”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나요?”
“그게 아니고….”
용화는 얼버무렸다. 그가 그동안 공부한 바로는 증산 선생은 금산사 미륵불이었다. 동곡 스승 또한 이를 전제로 현무경을 풀이했었다. 증산의 언행을 다룬 많은 경전에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 미륵불을 보라. 금산사 미륵불은 손에 여의주를 들었으나 나는 입에 물었노라….> 같이 증산이 금산사 미륵불임을 암시하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혹시, 증산께서 금산사 미륵불이 아닌가요?”
용화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흐음….”
문홍은 깊은 신음을 토한 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찬바람이 윙윙 소리를 내며 마당을 쓸었고, 창호지 문이 바르르 떨렸다. 문홍은 거두절미하고 대못부터 박았다.
“결론만 말하지요. 증산 어른은 미륵불이 아니고 옥황상제님입니다. 절대자 하느님.”
용화는 토끼같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 책에는 미륵불로 되어 있던 것 같은데….”
“책을 얼마나 보셨수?”
책이라면 볼 만큼 보았고, 스승인 동곡의 비기까지 전수 받은 용화였기에 속으로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문홍은 빤히 용화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강렬했다.
“무슨 증거로 그렇게 단정 짓습니까?”
이번에는 용화가 강하게 밀고 나갔다.
“허허허. 금산사 미륵불을 찾으라 했지, 증산 어른이 미륵불이란 말은 없을 텐데요, 허허허.”
문홍은 기가 막힌 듯이 웃기만 했다.
사방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구릿골의 한겨울 분위기는 적막했다. 어디선가 기러기 떼가 끼룩거리며 북쪽 하늘로 열을 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한바탕 설전을 벌인 용화가 마당에 나와서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상념에 잠겨 있으려니 문홍이 다가왔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돌아가도록 해요.”
“….”
뭔가 정보를 주겠다는 허락의 신호였다. 문홍이 손가락으로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산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기 저 산을 보시오. 오로봉(五老峰)이라고 하지요.”
“오로봉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선생님?”
용화는 이미 호칭을 선생님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었다.
“다섯 개의 권위 있는 산이라는 뜻이지요. 구릿골을 중심으로 5개의 산들이 병풍처럼 빙 둘러쌓고 있는데, 이 마을에서 상제께서 천지공사를 보신 것입니다. 즉 이곳이 천지공사(天地公事)의 기지가 되는 셈이지요. 그나저나 천지공사가 무슨 뜻인 줄 아시나요?”
“미래를 설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천지공사란 하늘과 땅의 운행질서를 개조하여 바꾼다는 뜻이지요. 천체가 운행하는 질서, 즉 해와 달과 별, 그리고 28숙이 기존의 운행하는 법도를 따르지 않고, 새로운 길(路)로 변경시켜 운행시킨다는 의미로, 지구상에 다가올 미래 역사의 프로그램도 다시 설계하여 그 도수(度數)대로 역사가 진행되도록 공사한 것을 말합니다. 이적(異蹟) 중의 이적이 천지공사지요.”
천지공사가 무엇인지쯤은 용화도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다만 다가올 후천에 펼쳐지는 그 천지공사의 도수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게 관심사였다. 문홍이 소장한 천문을 친견하고 싶어 조바심이 일었다. 그런 용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홍은 구릿골이 천하의 명당이라고 자랑스럽게 설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