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 : 영본시대 제 4회

김영수 장편소설 / 일러스트 나은진

2010-09-28      기자

2장. 천지 도수(天地 度數)

석종(石鐘)으로 떨어진 용-2

정방형의 방등계단을 수백 번 탑돌이를 했어도 방등계단엔 이따금 바람만 일뿐 아무것도 없이 휑하기만 했다.

‘혹시 때가 무르익지 않은 것인가?’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휴우-”

자기도 모르게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사내는 지친 듯 계단 기단 벽을 기댔다. 방등계단을 돌고 있는 사내는 용화(龍華) 선인(仙人)으로 불리고 있었다. 용화란 미륵이 강림하는 용화세계를 구현하라는 뜻으로 스승이 손수 지어준 이름이었다.
현생한 미륵을 맞이하기 위해 지난 10년을 하루같이 정진해왔던 그였다. 세상에 드러낼 시기를 절치부심하던 중, 드디어 하늘의 계시를 받았으나 그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천지공사(天地公事)를 감지할 능력이 없는 것이 한탄스럽구나.’

계시를 알기 전에는 이곳을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하지만 허기에 지친 육신은 슬며시 타협의 손을 내밀고 있었다.
방등계단을 기댄 용화의 손가락에 굴곡이 느껴졌다. 기단에 새겨진 음양의 요철 때문이었다. 그가 더듬은 것은 기단에 새겨진 매월당의 한시였다. 절로 한탄이 나왔다.

“옛날엔 걸출한 선인들이 많았건만….”

홀연히 선선한 한 줄기 바람이 불더니 사내를 휘돌아 감았다.

때는 1461년 세조 7년 모악산 금산사 미륵전.
작지만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3층 높이의 장중한 미륵삼존불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륵불에 경배의 절을 올리기는커녕 눈을 부릅뜬 채 한판 눈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내였다. 그는 매월당 김시습이었다.
매월당의 차림은 괴이했다. 양반 복장은 유(儒)요, 의복의 색은 먹장삼의 불(佛)이요, 머리에 평평한 천장의 삿갓은 선(仙)을 상징하는 유불선이 어우러진 야복(野服) 차림이다.
세상은 더없이 흉흉했다. 수양대군은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을 참살하고, 복위운동이 두려워 어린 조카인 단종마저 강원도 산골에서 무참히 살해한 뒤에도, 단종 친위세력들을 우물 속에 생매장하는 등 피의 향연을 멈추지 않았다.
임금과 신하의 도리를 배운 유생이라면 세조의 만행을 규탄하며 한양을 향해 머리를 풀고 곡을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천벌이었을까. 세조가 왕위 찬탈한 직후부터 몇 년간 가뭄으로 인한 흉년이 지속되어 민심은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매월당도 세조의 행위에 분노해 모든 경서(經書)를 찢어 불태우고 정처 없이 팔도를 떠도는 유랑객이 되었다. 벌써 여섯 해를 넘게 구름처럼 흘러 다니다 보니 더 이상 분노도, 좌절도 닳은 짚신처럼 너덜너덜해졌다. 인걸들은 피를 뿌리며 꽃처럼 허무하게 떨어졌건만 산천은 의연하게 사계절을 돌리고 있었다.
매월당은 유심(有心)한 인도(人道)와 무심(無心)한 천도(天道)가 서로 다름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현생은 과거의 업보일 뿐이었다. 미래가 중요했다. 민초들의 삶을 보장할 새로운 사회변혁 사상이 절실했다. 계룡산 동학사에서 단종의 제를 올리고, 지체 없이 미륵신앙의 원천지인 모악산을 찾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여기엔 없어…. 미륵전에는 미륵이 없어.”

매월당은 끝내 배례를 올리지 않고 삼존불을 뒤로 하고 미륵전을 나왔다. 마당을 가로지르다가 매월당은 뒤를 돌아 미륵전을 올려다보았다. 미륵전 뒤로 모악산 정상인 국사봉이 눈에 들어왔다. 우뚝 솟은 국사봉 주위에 석양에 반사된 햇무리가 서기처럼 테를 두르고 있었다.
‘어미산’이라고도 불리는 모악산(母岳山)은 전형적인 ‘평지 돌출산’이다. 예로부터 사방이 탁 트인 평지 돌출산은 선각자들의 태반이었다.
서해 지평선을 연장한 호남평야를 마음껏 질주하다 보면 별안간 가파른 산맥이 가로 막아서는데, 사방 백리가 넘는 평지를 급하게 치솟은 모악산이다.
모악산은 정상에서부터 산이 겹치면서 아래로 구불구불 급하게 뻗친 모양이 마치 지네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내려오면서 머리를 쳐든 형상과 같다하여 오공비천혈(蜈蚣飛天穴)이라 부른다.
그 오공비천혈에는 다섯 개의 혈이 있는데, 최고 혈자리에 자리 잡은 터가 다름 아닌 금산사(金山寺)다.
매월당은 가파른 북쪽 계단으로 향했다. 가쁜 숨을 들고 내쉬며 올라서니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널찍한 화강석으로 만든 평상만이 펼쳐 있었다. 방등계단(方等戒檀)이다. 방등계단은 사각형의 평탄한 돌을 놓아 매우 넓은 2층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첫인상은 하도 휑하여, 건물이 불타고 돌 기단 터만 남은 폐허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만약 중앙에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종 모양의 화강석 종탑마저 없었다면 그런 추측은 당당했을지 모른다.
매월당은 벼락 맞은 나무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바람도 머물지 못하고 스쳐가야 하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평평한 방등계단. 돌로 만든 종만이 침묵을 울리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전부였다. 해가 떨어진 자리에 저녁별이 총총했다. 매월당은 한탄처럼 시 한 수를 읊었다.

매월당은 다시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국사봉과 미륵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렸다.

“미륵전은 3층이 아니야. 저 국사봉이야말로 미륵전의 가장 마지막 지붕이지. 그래, 미륵이 바로 여기 계셨구먼.”

매월당은 엉뚱하게 방등계단에 절을 했다.
미륵신앙의 중심지인 미륵전은 금산사의 정수리였다. 3층 누각 안에 모셔진 웅장한 삼존불에 압도되지 않는 이가 없다. 하지만 매월당이 보기엔 미륵전에는 미륵이 없었다. 미륵불의 형상만 있을 따름일 뿐이었다. 형상 없는 미륵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방등계단에 있었다.
미륵전은 미륵이 지상으로 내려온 형상이요, 방등계단은 미륵이 만들려는 이상향인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미륵전이 유(有)의 세계라면, 방등계단은 무(無)의 세계였다. 형상 없는 무도(無道)를 설명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만든 것이 유형의 불상(佛像)이요, 유형은 무형의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였다.
지상세계 미륵전의 외형은 시간적으로 과거·현재·미래, 공간적으로 상·중·하 3단계 차별을 상징하는 3층 모양이다. 반면 방등계단은 사방팔방이 차이 없이 모두 평등한 미륵의 도솔천을 완성한 형상이었다.
그러나 방등계단과 미륵전은 긴밀하게 한 몸이다. 미륵전은 겉에 보이는 3층이 전부가 아니다. 미륵전 안으로 들어서면 내부는 층이 없다. 한통으로 통해 있다. 외형이 육신이라면 내부는 마음이다. 차별이 있는 육신 내면의 마음속에는 차별 없는 미륵의 씨앗을 이미 품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미륵전이 차별 속의 평등이라면, 방등계단 2층 기단은 평등 속의 차별이다. 미륵불의 외형을 보려거든 미륵전을 찾아야 하지만, 미륵을 직접 친견하려거든 미륵의 마음을 형상화한 방등계단을 찾아야 했다. 미륵은 애초부터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한동안 하늘의 별과 달을 바라보던 매월당은 객사로 돌아와 검은 먹으로 일필휘지 써내려갔다.

무릇 사람의 호흡은 천지의 호흡이로다.

동지 이후부터는 날숨[호]이요
하지 이후부터는 들숨[흡]이니
이것이 일 년의 호흡이로다.

자시 이후부터는 날숨이요
오시 이후부터는 들숨이니
이것이 하루의 호흡이로다.

하늘의 일 년과 하루는 곧 사람의 한번 호흡이니
이로써 일원(一元)의 도수는 129,600년이요
우주의 큰 변화는 1년이 되노라.

청주에서 매월당을 만나러 모악산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벗 조진사는 그 광경을 보고 물었다.

“이보게 동곡(매월당의 다른 호), 무슨 뜻인가? 일 년이 129,60 0년이라니? 360일 아닌가?”
“조선의 사계절만 사계절이 아니지. 우주에는 더 큰 사계절이 있어. 작은 한 해가 360일이고, 우주의 큰 한 해는 129,600년이야.”
“우주에도 춘하추동이 있다는 겐가?”
“물론이지. 북두 우주의 대원(大圓)을 중심으로 태양이 돌고, 다시 땅이 돌고, 달이 돌고 있어.”
“음, 어렵군.”
“어렵긴. 대원과 소원(小圓)을 곱하면 되지.”
“내가 셈에 약해서…….”

조진사는 겸연쩍은 듯 마른 침을 넘겼다. 매월당은 허공을 노려보듯 실눈을 뜨고 염불처럼 중얼거렸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