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 풍속사 <제17화>

2007-05-31      
기녀 노화(蘆花)의 모획(謀劃)

조선 성종 때, 전라도 장성(長城)에 자색이 뛰어나 남자들이 얼핏 보기만 하여도 정신을 잃고 저절로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는 노화란 기녀가 있었다. 방백(方伯:관찰사)과 이웃한 고을의 수령들이며 왕래하는 사성(使星:지방출장중인 벼슬아치)들까지 너나할 것 없이 추한 소문을 남기게 되었고, 이 소문은 천리를 건너 한양 유생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직 제수를 기다리던 성품이 강직한 한 유생이 이 소문을 듣고는 임금께 주달(奏達)하여, 자신이 가서 그 기생을 죽이고 민생을 소홀히 한 관장들을 벌하고 오겠다고 자원했다. 이 얘기를 들은 임금께서 흔쾌히 승낙하여 어사로 제수하고 첩지를 내리니, 유생은 어사가 되어 왕명을 받들어 장성으로 출발하게 되었고 미리 공문을 보내 노화란 요기를 잡아들여 감옥에 구금토록 명했다.

관장이 공문을 접하고는 노화를 불러 모든 사실을 말하니, 노화가 다 듣고는 빙긋 웃으며 말하기를,

“영감께오선 아무 걱정 마시고 소녀를 믿고 이틀의 시간을 주시옵소서” 하였다.

관장이 걱정하여 불편한 기색으로 묻기를 “네게 좋은 모획이라도 있는게냐?”하니, 노화는 아무런 대꾸 없이 싱글거리며 관아를 나왔다.

다음날 날이 밝자 노화는 소복차림의 수수한 시골여자로 꾸미고, 어사가 오는 길목의 냇가로 나가 한나절을 기다렸다.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며 석양을 만들었고, 붉은 비단을 가지고 빨래를 하던 노화는 푸른 숲과 황혼 빛에 어우러지며 냇가에 피어난 한 송이 모란꽃 같았다. 어사가 지나오면서 이 모습을 보니, 그 아름다운 소복여인의 자태가 얼마나 요염하고 형언할 수 없는 감흥을 불러 일으켰던지 그만 그 자리에 멈춰서며 넋을 잃고 말았다.

인근 주막에 여장을 푼 어사는 주막의 통인을 불러 냇가에서 빨래하던 소복여인을 아느냐고 물었다.

통인이 잘 안다며 말하기를 “이 마을 여자로 일찍 남편이 죽어 혼자 사는 20여세의 과부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이에 어사가 말하기를 “내 그 여인을 본 후론 통 잠을 이룰 수가 없네. 자네가 이런 내 심정을 헤아려 그 여인을 불러 줄 수 없겠는가”하고 사정했다. 통인이 몇 번을 거절했지만 어사의 간곡한 애원에 도저히 거절할 수 없어 여인에게 갔다 와서는, 여인이 오지 않으려 해 데려올 수 없었다고 말했다. 어사는 밤이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 다시 가서 불러오라고 간청했다. 이렇게 통인이 여러 번을 왕래한 끝에 여인을 불러왔다.

호롱불을 사이에 두고 다소곶이 앉은 여인은 냇가에서의 모습보다 더 자극적이고 요염하여 어사의 혼을 빼놓았다.

여인이 말하기를, “쇤네 비록 천한 여자이지만 한 번 정조를 잃으면 기생밖에 될 수 없으니, 나으리의 청을 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하며 일어나 나가려하자 넋을 잃고 있던 어사가 와락 여인의 잘록한 허리를 껴안으며 간청했다.

“내게 어떠한 변고가 생길지라도 자넬 버리는 일이 없을 터이니 여기 머물러주게.” 어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오나.” 여인이 말문을 열자 어사가 말문을 막으며 말을 이었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하였거늘, 내 어찌 사대부가의 자제로 한입에 두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내 조상님들의 이름에 누를 끼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니 날 믿어주게.” 어사가 말을 끝내며 여인의 둔부를 꼭 끌어안았다.

여인은 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스르르 어사의 품에 안기었다. 어사가 소원하던 여인을 품에 품으니 꿈결을 걷는 듯하여 더없이 좋았다. 방사의 쾌감을 여러 번 맛보아도 부족하고 부족하였던지라 알몸의 여인을 꼭 끌어안고 복숭아와 앵두를 희롱하며 그 밤 내내 잠들지 못했다. 첫닭이 울고 여인이 나가면서 말하기를 “남아 일언이 천금보다 무거운데 저를 버리지 않으시겠지만, 쇤네 아직 서방님의 존함조차 모르오고, 쇤네 또한 서방님을 잊을 수가 없으니 쇤네 팔에 존귀한 서방님의 함자를 친필로 써 주시옵소서”하며 백옥같이 맑은 팔을 내미니, 어사는 흐뭇한 미소를 가득 머금고 팔에 이름을 써 주었다.

노화가 돌아와 그 글씨를 바늘로 찔러 먹을 묻혀 피부에 완전히 새긴 다음, 관아로 돌아가 옥에 구금되어 있었다.

어사가 장성관아에 도착해 형벌기구를 갖추고 호령하여 노화를 잡아와 처단하라 엄명했다. 노화가 끌려오니 어사는 요기를 보지 않겠다며 문을 닫고 방안에서 명령을 내렸다. 노화가 밖에서 어사에게 말하기를 “쇤네가 아무리 요망한 계집이라 할지라도 쇤네에게 소명(疏明)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 바른 이치가 아니겠습니까”하였다. 이에 어사가 노화의 소명을 듣겠다 말하니, 노화가 시(詩) 한 수를 지어 어사에게 올렸다.

蘆花臂上刻誰名(노화비상각수명) 노화의 팔위에 뉘 이름 새겨 있는가?

墨入雪膚字字明(묵입설부자자명) 흰 살에 먹물이 스며 글자마다 선명한데.

寧使川原江水盡(영사천원강수진) 차라리 강의 근원인 하천이 말라버릴지언정,

此心終不負初盟(차심종불부초맹) 이 마음에 굳게 맺은 처음 맹세 변할 수야 있으리오.

어사가 시를 보곤 놀라 문을 벌컥 열고 내다보니, 노화가 팔을 높이 들고 있어 쳐다보니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어 어쩔 줄 몰랐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려 어사는 장성에 머물면서 노화와 함께 지냈으며, 일이 조정에 알려져 관직을 잃게 되었고 임금께서 모든 얘기를 소상히 듣고는 크게 웃었고, 벌하여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청을 묵살하며 노화를 첩으로 내렸다.

이 설화는 ‘이순록’과 ‘기문총화’, ‘해동기문’ 등등 각각의 설화집에서 이야기와 노화가 남긴 한시가 같거나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찾아 볼 수 있는데, 많은 문헌에 등장함은 아마도 구성과 표현이 다른 설화에 비해 뛰어나며 문학적 정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노화를 장성의 기생이었
다고도 하고 평양의 기생, 또는 함안의 기생이라고도 기록하고 있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아쉬운 맘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