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과학수사파일 제20회

2007-01-12      
땀에서 검출한 혈액형

“증인의 직업은 공무원이며 이름은 최상규죠?” 검찰 측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 먼저 증인은 본 사건에서 많은 증거물을 감정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중 피의자 소유의 양말과 러닝셔츠의 혈흔 감정에 대해서 몇 가지 질의하기 전에 참고사항을 말씀드립니다.
본 건 증거물은 1986년 ○월 ○일 피해자에 대한 변사 발생 보고를 받고, 즉시 시체가 있는 현장에 나가 당시 피의자가 신고 있던 양말과 현장에서 약 30m 떨어진 지점에서 피의자 소유의 러닝셔츠를 수거하여 귀 연구소에 혈흔 검출 유무 및 혈액형을 감정의뢰했습니다.

양말, 러닝셔츠 모두 혈흔 반응 양성이며, 혈액형은 ‘AB’형이라고 회보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피해자의 혈액형은 B형이라고 회보되었고, 피의자의 양말과 러닝셔츠의 혈액형은 모두 AB형으로 감정 회보된 바, 이들 혈액형 감정 결과는 감정상의 오류가 아닌가 합니다.


귀 연구소에서 감정한 양말과 러닝셔츠의 혈흔 감정은 절대적으로 정확한 것인가요?
“예, 질의에 대해서 간략하게 답변 드리겠습니다. 당 연구소 실험실에서 감정한 양말과 러닝셔츠의 혈흔 감정 결과의 내용은 ‘AB형으로 반응함’으로 회보했습니다. AB형으로 반응했다는 것은 실험방법 및 원리, 조작상의 오류는 없는 것이며, 틀림없이 A형 및 B형의 혈액형 물질이 함께 증명된 것입니다. 따라서 AB형으로 반응했다는 의미는 반드시 그 혈흔 자체의 혈액형이 AB형인 사람의 혈액이라는 뜻으로 단정할 수는 없으며, A형의 혈액에 B형의 혈액 또는 B형의 인체분비액인 땀, 정액, 타액, 소변 등 또는 B형의 혈액에 A형의 인체분비액 등이 혼합되는 경우에도 AB형의 혈액과 똑같은 현상의 반응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본 건 혈액형 감정 결과가 AB형으로 반응했다는 것은 과학적 사실 그대로이며, 그 표현 역시 틀림이 없습니다.”

- 본인의 생각으로는 피의자가 피해자를 살해하기 전, 피해자가 손톱으로 할퀴고 돌을 던지기도 하여 피의자의 팔 부위 등 여러 곳에 찰과상이 있는데, 그때 출혈로 인해 피의자 손에 피가 묻어있는 상황에서 위 증거물을 만졌을 경우, A형인 피의자의 혈액과 B형인 피해자의 혈액이 혼합되어 AB형으로 판정된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위 증거물의 감정방법은 어떠하며, 가령 그 증거물에 범인의 피가 묻어 있다거나 또는 다른 인체분비액이 섞여 본래 B형인 혈액형이 AB형으로 판정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것인지요?

“당 연구소에서 실시한 양말 및 러닝셔츠에 부착된 혈흔의 감정방법은 우선 양말과 러닝셔츠에서 혈흔이 가장 많이 묻은 부위에서, 혈흔을 채취하여 예비시험, 본시험, 인혈 증명시험을 거쳐 혈액형을 검사했습니다. 그 결과 ‘AB형으로 반응함’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질의사항에서와 같이 혈액형이 B형인 혈액과 A형의 다른 혈액이 함께 묻어 혼합된 상태라면 그 혈액형이 AB형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본 건 증거물에 부착된 혈흔은 어떠한 경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B형의 혈액과 A형의 혈액이 함께 묻어 혼합된 상태의 경우 AB형이 나타날 수 있으며, 또는 양말과 러닝셔츠 소유자의 땀이 묻어 있을 경우 그 땀에서도 혈액형 반응이 나타납니다. 가령 A형의 혈액을 가진 사람의 땀이 묻어 있다면 땀의 A형과 혈액의 B형이 혼합되어도 AB형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지금 어느 경우라고는 말씀드릴 수 없으며, 그 증거물을 다시 세부적으로 재감정한다면 어느 경우인지 밝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재판장의 명의로 문제의 증거물인 양말과 러닝셔츠의 재감정의뢰를 받아 열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서울로 향하는 내 기분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공정한 재판을 위해 과학적인 사실 그대로 최선을 다해 답변하고 난 후에 느끼는 후련함 탓일까?
나는 가끔 이번과 같은 감정증인으로 법정에 나가곤 한다.
어떤 경우에는 간단히 끝나 싱겁게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침이 마르고 머리가 아프도록 진지한 질문에 답변하느라 진땀을 뺄 때도 있다.
다음 날 나는 감정의뢰서를 찾아 이 사건의 내용을 다시 검토해 보았다.

1986년 ○월 ○일 20시 30분경, ××군 소재 목장 앞 도로에서 피의자는 술에 취한 채 가던 중, 같은 동네에 사는 20대 여자를 만나자 우발적으로 근교 야산의 정상까지 유인, 강간하려다 피해자의 완강한 거부로 미수에 그쳤다.

그러나 피해자는 강간하려던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위협하면서 피의자에게 돌을 던지며 욕설을 퍼부어댔다.
피의자는 격분한 나머지 피해자의 머리를 돌로 강하게 내리쳤다.

결국 피해자는 사망했고 사인은 두개골 함몰골절에 의한 뇌출혈이었다.

그후의 수사 진행상황을 보면 피의자는 경찰, 검찰에서는 물론 법정에서의 수회 공판까지도 자백하다가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범행을 부인했다.

그리고 결심단계에서도 범행을 자백했다.
재판부에서는 피해자의 혈액형이 B형인데 어떻게 피의자의 양말과 러닝셔츠에서는 AB형으로 반응한 것인지에 대해 강력한 의문을 표시해 왔다.

결국 나는 감정증인으로 법정에 선 것이다.
나는 재감정의뢰된 러닝셔츠를 대상으로 러닝셔츠의 앞과 뒤, 목 부위 등 모두 12부위와 양말 8부위를 임의로 선정하여 혈액형 검사를 실시했다.

모든 검사 부위는 1차 시험에서 감정한 부위를 제외한, 혈흔이 묻지 않은 대조 부위였으며 땀이 많이 묻어 있을 부위와 묻지 않았을 부위를 구분하여 검사했다.

그 결과 러닝셔츠에서는 땀이 많이 묻을 수 있는 목 부위, 겨드랑 부위를 비롯한 대부분에서, 양말은 발바닥 부위 5곳에서 모두 소유자의 혈액형인 A형의 반응이 나타났다.

그러나 양말의 발목과 발등 부위 등 3곳에서는 혈액형 반응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 결과로 보아 두 증거물은 분명 소유자의 땀에서 A형 혈액형 반응을 나타낸 것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증거물 사진에 검사한 위치를 부위별로 표시해 감정서로 작성한 후 즉시 법원에 통보했다.
결국 이 사건의 피의자는 재판부로부터 유죄를 선고받고 중형에 처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