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명기 편 | 제 26 회

2006-04-27      
자연산 향수는 연인들에게 어떤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 또한 어떤 식으로 성적 자극에 작용하는가. 이에 대해 히로미는 확신을 갖고 설명에 열을 올렸다.“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재스민향도 성적 자극을 불러일으키는데 뛰어난 효험이 있죠. 장미가 꽃의 여왕이라면 재스민은 꽃의 왕이에요. 온화하면서도 뇌를 진동시킬 정도로 향기가 진해서 울적한 심사를 풀어주고 성 불능 치료에도 효험이 있어요. 그런데 강쇠씨. ‘일랑일랑’이라는 향수 이름 들어봤나요?”“일랑일랑? 처음 듣는데, 무슨 향수지?”“일랑일랑은 필리핀이 원산지로 아주 매혹적인 향을 지닌 이국적인 꽃이죠. 샤넬 같은 유명 향수회사 관계자들이 꽃 중의 꽃으로 부를 정도니 그 효능이 오죽하겠어요. 게다가 이 꽃은 신경조직에도 자극을 줘 최음 효과가 탁월해요. 그런가 하면 지중해 쪽에서 많이 생산되는 샐비어는 상대방을 자석처럼 끌어당길만큼 마법적 힘을 발휘하죠. 다만 향기가 너무 독해서 환각상태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게 흠이긴 하지만요.”강쇠는 한쪽 귀로 설명을 들으면서도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지 않고 히로미의 신체 검사를 강행했다.

순찰의 최종 기착지는 히로미가 은밀한 곳에 숨겨두었다는 향낭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히로미의 향수 내음이 얼마나 강렬한지 마치 최면에 빠진 듯 정신이 멍해졌다. 이 때문에 순찰 임무를 맡은 손가락이 번지수를 못찾고 엉뚱한 곳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강쇠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아 정말 대단한 향수로군. 화생방 훈련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이게 뭐야. 안되겠어. 이러다간 본격 대결을 펼치기도 전에 넉다운돼 버리겠어.’강쇠는 애써 정신을 수습하며 순찰 병력을 강화시켰다. 이어 대대적인 검문검색 끝에 마침내 숨어있는 향낭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공교롭게도 향낭은 삼각대에 빨래처럼 걸려 있었는데, 강쇠는 발견 즉시 떼내 뒷주머니에 챙겨넣었다. 그런 다음 지체없이 ‘일자 숲’을 향해 진군했다.

“아… 아…”나지막한 탄성이 히로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이어 강쇠가 절도 있게 진퇴를 거듭하자, 히로미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무 벤치가 삐걱삐걱 요동을 쳤고, 강쇠와 히로미는 점점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강쇠가 전매특허인 용 비법을 구사하자, 히로미는 금방 숨이 넘어갈 듯 전신을 부르르 떨며 절정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쇠는 그렇게 위중한 상황에서도 한국의 ‘일자 숲’과 비교하는 수고를 잊지 않았다.‘과연 일본판 ’일자 숲‘도 반응이 대단하군. 한국과 비교해 뛰어나면 뛰어났지, 전혀 손색이 없어. 하지만 아직은 결론이 일러. 마지막 반응이 어떨지 끝까지 확인해야 해.’강쇠는 그렇게 다짐하며 명기 교오코를 혼절시켰을 때 썼던 비장의 방중술 ‘백호비상’을 펼쳤다.

그 직후, 히로미의 입에서 벽력같은 고함소리가 터졌다.“까악!” 고막을 찢는 듯한 굉장한 소리에 강쇠는 본능적으로 귀를 막았다. 아뿔사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미 오르가즘에 도달해버린 히로미는 강쇠의 귀에다 입을 묻고 비명을 잇달아 폭죽처럼 터뜨렸다. 동시에 너무나도 극심한 통증이 엄습했다. 강쇠는 얼른 귀를 막으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급기야 통증을 견디지 못한 강쇠는 그만 까무라쳐 버리고 말았다. 히로미는 강쇠가 기절한 사실조차 모른 채 계속해서 쾌락의 극치를 느끼며 연속해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다가 마침내 흑흑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강쇠의 몸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강쇠씨 왜 조용하죠? 어머머 세상에 이럴 수가. 강쇠씨 귀에 피가! 강쇠씨. 정신차려요. 강쇠씨!”놀란 히로미는 강쇠를 붙들고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강쇠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히로미는 눈을 크게 뜨고 강쇠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귓 속에서 흘러내린 피가 볼을 타고 턱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히로미는 사색이 되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어디론가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갔다. 잠시 후 앰뷸런스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왔다. 강쇠는 구급 요원들에 의해 즉시 차에 태워졌다. 옆에 함께 탄 히로미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강쇠를 흔들어 깨웠다.“정신차려요 강쇠씨. 아 어떻게 이런 일이…강쇠씨. 제발 정신 좀 차려요. 네에?”누군가 몸을 마구 흔들어대는 느낌에 강쇠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눈 앞에 히로미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쇠는 곧바로 사태를 짐작했다. 강쇠가 깨어난 것을 안 히로미의 눈에 안도의 빛이 스쳤다. “아 이제야 정신이 들었군요. 정말 죄송해요 강쇠씨. 나 때문에 이런 일이…”강쇠는 멍한 표정으로 히로미의 입을 주시했다. 이상했다. 분명 히로미가 뭐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귓 속이 송곳으로 후벼파듯 또 한차례 극심한 통증이 엄습했다. 강쇠가 얼굴을 찡그리자, 히로미가 안절부절 못했다.

“많이 아프신가 봐요. 이걸 어쩌면 좋아.”강쇠는 가슴이 철렁했다. 또 다시 히로미가 말을 한 것 같은데, 모기소리마냥 아주 조그많게 들리는 게 아닌가. 강쇠는 통증을 억지로 참으며 히로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가 완전히 제 기능을 상실한 것 같았다. 강쇠는 덜컥 겁부터 났다.“오, 이 무슨 해괴한 일이 내게 벌어졌단 말인가. 이대로 영영 귀머거리가 되는 건 아닌가.”계속해서 귀를 기울여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자, 급기야 강쇠는 절망감에 빠졌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평소엔 믿지 않던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은 심정마저 들었다. 이때였다. 비탄에 빠진 강쇠의 뇌리 속으로 월남전 때 아버지가 간절히 올렸다는 기도가 느닷없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월남 전 초기에 아버지는 백마부대 용사로 참전해 정글을 누볐다. 그러던 어느날, 월맹군에 기습 포위돼 생사를 가르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포탄이 우박 떨어지듯 퍼부어대고 총알이 빗발처럼 날아드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죽음을 예감했다고 한다. 이때 아버지는 철모를 꽉 끌어안고 난생 처음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도 내용이 절박한 상황치고는 다소 엉뚱한 바가 있었다.

“하느님, 저를 살려만 주신다면 다시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습니다. 바람도 절대로…피우지 않겠습니다.”강쇠는 훗날 아버지로부터 그 회고담을 들었을 때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가 왜 그런 뚱딴지같은 맹세를 하느님께 드렸는가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혹시 그전서부터 생업에 게을렀기 때문인가 아니면 할아버지의 유언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자책감 때문인가.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강쇠는 아버지의 당시 심정이 확연히 깨쳐졌다. 그것은 비상 사태에 대한 대처였다. 안이함이 사고를 부르고, 나아가 죽음까지 맞이할 수가 있는 것. 강쇠로선 히로미의 존재를 우습게 봤다가 이 지경을 당했으니, 정말이지 후회가 막급했다. 그게 다 철두철미하게 대비하고 부지런을 떨지 않아서 그런게 아닌가 싶었다.앰뷸런스가 신속히 강쇠를 병원에 후송하고는 되돌아갔다. 그런데 천만다행스럽게도 응급 치료를 받고 나자 막혔던 귀가 또록또록 들려오기 시작했다. 강쇠의 귓 속을 정밀 진찰한 의사가 말했다.

“쯧쯧 대관절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습니까. 양쪽 고막이 모두 파열됐어요. 귀를 막았으면 덜했을 텐데, 도대체 뭘하고 있었죠?”“벽력신공 때문에 그만…나도 모르게 당하고 말았습니다.”“예에? 벽력신공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강쇠는 솔직히 이실직고 하고 싶었지만 의사가 곧이곧대로 믿어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궁여지책 끝에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의사선생님 여자를 좋아하십니까. 아니, 좀더 구체적으로 질문을 드리죠. 혹시 기차 불통을 삶아 먹은 여자와 자본 적이 있으십니까.”사오정 같은 질문에 의사는 황당한 표정으로 강쇠를 쳐다보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