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썽이된 첫 발언
2003-09-18
이번에 만약 3선개헌을 성공시키지 못한다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기의 충성을 이승만대통령께 보여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기붕의장은 이처럼 융통성 없고, 소심하고, 충직한 사람이었다. 그 때 이재학이 나서며 조심스럽게“의장각하께서 직접 김두한의원을 불러다 달래보시면 어떨까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장경근 책사도 “제 생각에도 그러시는기 좋갔구만이오.”라고 맞장구를 쳤다. 이어서 장의원은“김두한은 원래 깡패출신이라 단순하고 무식하니끼니 잘 달래고 좋은 미끼를 던지면 곧 돌아올지도 모르디요.”장의원과 이재학의원의 말을 듣고 있던 이기붕의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는게 좋을 것 같군요. 어디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보지요.”서대문 ‘경무대’에서 이런 음모가 진행되고 있을 때, 한편 조병옥을 중심으로 한 야당진영에서도 부정선거에 대한 대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오늘 김두한의원이 단상에서 말한것처럼, 이번 5·20 선거는 철저하게 관권이 개입한 사상최대의 경찰선거였어요. 그 대표적인 예가 신익희의장께서 입후보한 경기도 광주 말입니다. 이 광주에서는 어떻게나 경찰이 극성스럽게 간섭하는지 야당 입후보자의 정견 회장에 한 사람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단 말씀이야.”조병옥 박사가 먼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말도 마소. 선거 전에 경찰이 모의투표라는 걸 실시했는데 자유당 공천 입후보자가 99%의 지지를 얻었다는구만.”당사자인 신익희 전국회의장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모의 투표에서는 여당 입후보자가 99%의 지지를 얻었고, 실제 선거에서는 야당 입후보자가 87%의 지지를 획득했다? 거 참 재미있는 숫자놀음이구만. 허허허.”그들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한심하고 걱정스러웠다.“내가 입후보한 대구에서는 어떻구. 이건 숫제 무법천지였다구. 치안을 담당해야 할 경찰이 깡패를 앞세워 가지고 야당 입후보자의 유세장에 나타나서는 몽둥이를 휘두르고, 마이크를 부수고, 운동원이 깡패한테 매를 맞고 코피를 흘리며 경찰서로 뛰어들어 갔는데도 말리지를 않는다구. 깡패가 경찰서까지 쫓아와서 갈비뼈를 분질러도 못 본척했단 말씀이야. 이거 이래서 되겠어요? 안돼! 이대로 둬서는 나라가 망한다구!”조병옥 박사는 얼굴에 핏대를 올리며 분한 듯 소리치는 것이었다.“이러고도 모자라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무소속 의원들을 찾아가서 온갖 협박, 공갈을 다해서 회유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무조건 잡아서 감옥에 집어 넣는 거예요. 그 자들은 나라야 어떻게 되든지간에 그런 건 염두에도 없어요. 어떻게 해서든 삼선개헌에 필요한 정족수인 136명을 채우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거에요. 이승만 박사를 종신대통령으로 만드는 삼선개헌, 그것은 민주주의를 역행하고 제왕을 만들자는 것이에요. 이래서야 되겠어요? 안돼요! 우리는 대가리가 부서져도 이것만은 막아야 해요!”조병옥 박사는 이렇게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잘 해봅시다.”“용기를 내시오.”조병옥 박사의 집을 나서는 김두한의 심정은 매우 착잡하기만 했다.(아,아,…)자기 혼자만의 문제라면야 무슨 걱정할 일이 있겠는가. 자기 행동 하나 때문에 고락을 같이 하고 손이나 발처럼 움직여 준 부하들이 고통을 당하는 건 물론 밥줄마저 끊어져 버리니 어찌 가볍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승용차에 오른 김두한은“서대문으로 가자!”맥빠진 듯 털썩 승용차 시트에 주저앉으며 운전수에게 명령했다.▨ 대한민국에서 미국식 의회가 웬말이냐! 여기는 자유당 중앙 당사.“의장각하께서 들어오십니다. 일어나셔서 큰박수로 환영해 주시라요.”자유당의 책사 장경근 의원이 먼저 일어나서 다른 의원들을 선동했다.이 때 자유당 중앙당사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종신대통령으로 추대하는 3선개헌안을 놓고 의원총회를 열고 있는 것이었다.“쳇, 뭐 대통령이라도 들어오나? 일어나서 박수를 치게!”앞자리에 앉아 있는 김두한은 투덜거리며 일어나지 않았다. 아닌게 아니라, “모두들 앉으세요. 뭐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이기붕 의장은 게면쩍은지 얼굴까지 빨개져 가지고 소리쳤다.
그가 국회의장에 당선된 뒤 처음 갖는 의원총회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자기가 이런 과분한 예우와 대접을 받는 것이 어딘가 잘 맞지 않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그는 가난한 선비의 집에서 태어나 일찌기 부모를 잃고, 고학으로 미국 유학까지 마쳤으나, 타고난 성품이 대담하지 못하여 무슨 일이든 과감하게 밀어붙이지 못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유부단할 뿐 용기가 없었다. 이런 성품 탓으로 8·15광복이 될 때까지 한다는 것이 요릿집 지배인으로 근근히 목구멍에 풀칠을 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8·15광복이 되고,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하자, 그의 비서로 들어가 정성을 다하여 모셨던 것이다. 이기붕은 남들처럼 뚜렷한 정치적 식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뾰족한 재주도 없었다. 오직 이승만 박사를 하늘처럼 받들었고 충실하게 모시는 것만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