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과학수사파일 제19회

2007-01-05      
피 말리는 공동감정


내가 국과수에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낯선 사람이 실험실로 찾아와 자신을 당시 사건의 담당검사인 C라고 소개했다.
그는 보자기를 풀어서 자동차 안전벨트 두 개를 꺼내놓았다. C검사는 안전벨트에서의 혈흔 검출 여부와 검출된다면 그 혈액형까지 알려달라고 했다. 범인이 여대생의 목을 이 안전벨트로 감아 살해했으며, 피해자의 목에 상처가 나 피가 맺혀진 상태라고 했다.

나는 곧바로 안전벨트에 대한 혈흔감정을 시작했다. 먼저 육안으로 안전벨트 전체를 자세히 관찰했지만 혈흔이라고 할 만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안전벨트 두 개 중 하나에서 알 수 없는 물질이 육안으로 식별되었다. 안전벨트 쇠고리 부분에 불그스레하고 끈적끈적한 물질이 묻어 있었다. 이 부위를 섬유조각에 묻혀 혈흔 예비실험을 실시했다. 검사 결과 벤지딘 시험에서는 양성반응을 보였고, 무색 마라카이트 그린 시험에서는 음성반응을 나타냈다. 혈흔이 존재한다면 두 종류의 혈흔 예비시험에서 양성반응을 나타내야 한다. 즉, 무색 마라카이트 그린 시험에서 음성반응을 나타낸 것은 혈흔이 묻어있지 않다는 증거다. 그러나 벤지딘 시험법은 혈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양성반응이 곧잘 나타나는 결점이 있다. 다시 말해서 적혈염, 철판, 동판, 녹물, 과일즙 등에서도 양성반응을 나타낸다.
나는 이 안전벨트에는 피가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곧바로 감정 결과를 해당 검찰청에 감정서로 작성, 통보해 주었다.

그 후 약 1개월이 지나서였다. C검사가 실험실로 다시 찾아왔다. C검사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최 박사님, 저희는 이 안전벨트에서 혈흔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감정 결과에 매우 실망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유일한 증거는 안전벨트뿐입니다. 용의자는 분명히 안전벨트로 피해자 목을 졸라 살해했다고 자백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연구소에 재감정을 의뢰했습니다.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재감정을 의뢰한 것이 뭐 그리 나쁜 일입니까?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어디에서 감정하든 정확한 결과를 위한 목적이라면 아무 상관없지요. 그런데 뭐가 어떻게 잘못되었습니까?”
“누구나 실수는 있는 법입니다.”
“C검사님, 저희가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무슨 내용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사실은 이 안전벨트에서 혈흔도 검출되고 혈액형까지 나왔습니다. 정식 감정서도 받았습니다.”
나는 의아했다.
“그렇다면 안전벨트 어느 부위에서 혈흔이 검출된 것입니까?”
C검사는 안전벨트 쇠고리 부위를 가리켰다.
“그 부위는 저희도 몇 차례에 걸쳐 검사했습니다. 그러나 그 쇠고리 부위에 묻은 물질은 절대 혈흔이 아닙니다. 분명히 그 부위를 세밀히 검사하여 피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C검사는 내 말이 영 믿어지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 부위를 재검사하여 다시 확인해 드리죠. C검사도 함께 보십시오. 제가 설명도 해드리겠습니다.”

C검사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안전벨트 쇠고리 부위에는 아직도 미지의 물질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 물질을 채취하여 혈흔 예비시험을 모두 실시하며 설명까지 자세히 해주었다. 시험결과가 달라질 리는 없었다.
C 검사는 안색이 변해갔다.
“최 박사님, 지금 실시한 재검사 결과를 확인서로 작성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안전벨트에는 혈흔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확인서를 작성, 날인하여 C검사에게 넘겨주었다. C검사는 바쁜 듯 부리나케 실험실을 떠났다.
그 후 약 2주가 지났을까? C검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최 박사님, 그 안전벨트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왜요?”
“대학연구소에서는 계속 그 안전벨트에 묻은 물질은 피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최 박사님의 재감정 경위를 모두 설명했지만 피가 틀림없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동일한 증거물에 상반된 감정결과로 저희는 사건 해결에 혼선을 빚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동일한 증거물에 두 가지 감정결과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어느 쪽도 잘못된 감정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순간 해결책이 떠올랐다.
“C검사님, 한 가지 방법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번 감정 결과의 진위를 반드시 밝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전벨트의 감정을 공동으로 진행해야겠습니다. 공동으로 감정할 수 있도록 날짜와 장소를 정해 연락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돌아가서 곧 날짜와 장소를 정해 연락드리겠습니다.”

실험을 공동으로 진행한다는 것은 사실상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책이 없었다.
일주일 후였다. C검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장소는 대학연구소 실험실이며 날짜와 시간도 정해졌다.
나는 실험도구와 시약 등을 준비해 그 대학으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C검사와 대학 측에서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C검사는 문제의 안전벨트를 책상 위에 놓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소형 핀셋을 이용, 섬유조각에 벨트 쇠고리 부위에서 미지의 물질을 묻혀냈다. 그러고는 준비해간 세 종류의 혈흔 예비시험 시약으로 각각의 화학반응을 지켜보았다.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역시 혈흔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결과였다. 참석자들은 모두 긴장해 있었고, 실험실은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나의 시험결과를 모두 다 관찰한 당사자들은 무언가 수긍이 가는 듯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모두가 침묵으로 일관했다. 상대측은 실험을 더 할 필요도 없는 듯 잠자코 있었다. 끝으로 상대측 연구관은 두 기관 모두 공신력이 생명이며,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런 자리, 그런 분위기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먼저 일어서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나는 연구소로 돌아왔다.

안전벨트가 머릿속에서 잊혀질 즈음이었다. 난데없이 증인소환장이 날아왔다. 내용을 보니 바로 안전벨트를 증거로 제시했던 여대생 살인사건의 증인으로 출석해 달라는 것이엇다. 증언할 내용도 안전벨트 감정 내용과 어째서 혈흔이 아닌 것으로 감정되었느냐는 것이다.
물론 상대측도 증인으로 소환돼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정확한 감정 결과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없었지만 법정에 나가 안전벨트 감정에 관한 사항을 다시 이야기할 생각을 하니 숨이 막힐 듯했다.
드디어 법정 재판일이 되었다. 나는 증인석에 앉았다. 재판부에서는 끈질기게 질문을 퍼부었다.
“어째서 쇠고리 부위에 묻은 물질이 혈흔이 아닌 것으로 감정되었습니까?”
나는 혈흔감정법의 기초이론부터 차근차근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혈흔 예비시험의 종류, 시험법, 판정법 등까지 상세하게 설명해 나갔다. 안전벨트에 묻은 미지의 물질은 혈흔 예비시험에서조차 음성반응을 나타내어 혈흔이 아니라는 것이 진술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왜 대학 측에서는 그 물질이 혈흔으로 감정되었을까요? 증인으로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는 타 감정 결과에 대한 답변이 조심스럽고 궁색할 뿐이었다.
“혈흔 예비시험의 종류는 한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며, 대학실험실에서도 또 다른 종류의 예비시험을 실시해 나름대로 양성반응 결과를 얻은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됩니다. 그 다음 혈흔을 완전히 확인하는 본 시험과정이 있습니다만 저로서는 그 이상 아는 바가 없으며, 무어라 말할 입장이 못 됩니다.”
나는 씁쓸한 기분으로 법원을 나섰다. 큰 짐이라도 벗은 듯 홀가분해졌다. 그러나 지금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건이며, 과학수사 부문의 종사자로서 증거물 감정의 정확성과 그 중요성을 깊이 되새길 수 있었던 공동작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