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해보기나 해봤어?”

화제의 신간-신화를 만든 정주영 리더십

2011-03-15      기자

정주영은 젊은 시절 깨달은 ‘빈대철학’과 “이봐, 해봤어?”라는 말로 직원들을 이끈 리더십, 1971년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들고 차관을 빌리러 간 영국 등 유명한 일화가 많다. 저자 전도근은 이런 일화 등을 통해 정주영의 리더십 파워를 다섯 가지로 분석했다. 창조정신, 도전정신, 진보정신, 성공정신, 기업가정신이 바로 그것. 이 책의 일부를 요약 발췌해 정주영 리더십을 살펴봤다.

정주영의 고정관념 깨기는 그의 일생 동안 멈추지 않았다. 만약 정주영이 고정관념에만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었다면 그는 한국 현대사에서 거론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가난한 농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가 자신의 생활에 안주했다면 한국사에 ‘현대’라는 이름 역시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일을 해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자고 일해 쌀가게 주인이 되었고, 정신없이 달려 건설회사를 세웠으며, 결국 현대그룹의 창시자라는 자리에까지 올랐다.


안 되면 되게 하라

항간에 현대와 삼성을 비교하는 말들이 떠돈다. 하나의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삼성은 100여 장의 보고서를 만들고, 현대는 1장의 보고서만 만든다고 한다. 이 말은 두 기업의 장단점을 꼬집는 말이 아니라, 대표적인 경영 스타일을 꼬집는 말이다.

현대의 경우, 많은 생각과 연구 끝에 일을 시작하기보다는 실용적인 것을 우선시 하고 일단 계획을 세우면 밀고나가는 경영방식을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하면 된다’를 뛰어넘어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정신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정주영의 ‘하면 된다’는 세계 고속도로 건설 역사상 최단기간에 완공된 경부고속도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중략)

정주영은 경부고속도로 시공 후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바닥에 등을 붙이고 자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 자동차에서 잠깐씩 새우잠을 자는 것이 고작이었다.

직원들 입장에서는 너무한 일이었지만 그들의 게으름을 막기 위해 일부러 자동차를 타고 공사장 주변을 뱅뱅 돌기도 했다.

고속도로에 대한 열의는 박정희 대통령도 못지않았다. 고속도로에 관한 얘기를 하고 싶으면 시도 때도 없이 밤중이든 새벽이든 그를 찾아왔다. 밥을 먹을 때도, 막걸리를 나눠 마실 때도 그 둘의 관심사는 오직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착공한지 290일 만인 1970년 7월에 역사적인 경부고속도로 개통이 시작되었다. 290일 만의 고속도로 건설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일이었다.


신용 지키는 것이 철칙

정주영은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신용 하나로 거대한 현대그룹을 일구었다. 신용에 관련된 하나의 일화를 들어보자.

정주영은 젊은 시절 자동차수리공장을 인수한 뒤 한 달도 못되어 직원의 관리부주의로 공장이 불타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정주영은 자신을 믿고 공장을 차릴 때 돈을 빌려준 사람을 다시 찾아갔다. 단 한 번도 돈을 떼인 적이 없는 그는 정주영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선뜻 돈을 빌려주었다.

“내 평생에 사람 잘못 보아 돈 떼였다는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으니 다시 한번 빌려주겠네.”

돈을 가진 자들은 절대 손해를 보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손해를 보는 일을 원칙적으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손해를 볼 것 같으면 과감히 포기를 한다. 정주영의 경우는 어땠을까?

장사꾼인 그가 수익을 생각하고 사업을 벌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면 수익이 날 수 없거나 손해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신용’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손해를 볼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도 신용을 지키는 것이 철칙이었다.

현대는 낙동강 고령교 공사에서 진 빚을 청산하는 데 20년이 걸렸다. 공사를 시작하면서 이미 예견되었던 손해에 대해 신용제일주의자 정주영은 그의 방식대로 밀고 나갔다.

결국 현대는 고령교 복구공사로 입은 막대한 손해로 재기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정주영은 “기업가가 신용을 잃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는 신념으로 사람들의 걱정과 의심의 눈초리를 묵묵히 견뎌냈다.(중략)

그의 신념은 2년 뒤에 빛을 발하게 되었다. 정부는 손해를 보면서도 묵묵히 공사를 완수해 낸 ‘현대’에게 1957년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맡겼다. 현대는 한강 인도교 공사로 고령교 복구공사에서 손해 본 것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를 시작으로 경인고속도로 건설, 다목적 댐 공사, 항만공사 등 우리나라의 굵직한 토목사업들을 수주하였다.

결국 현대는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온 1960년대 국내 사회간접자본시설과 기간산업 건설의 중추적 역할을 도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