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 한권의 책이 인생을 바꾼다3 | 운명이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2010-09-17     최은서 기자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말을 남기고 봉화산에서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했다. 이후 전국적으로 추모의 열기가 뜨거워졌고, ‘인간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재평가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던 중 노 전 대통령의 1주기를 앞둔 지난 4월 26일, 노 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가 출간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출간되자마자 곧바로 4위에 오른 후 2주만에 1위에 올라 노 전 대통령을 향한 계속되는 추모 열기를 입증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책에서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다고 믿었는데, 돌아보니 원래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통령은 진보를 이루는 데 적절한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 것일까?”라며 검찰 수사를 겪으며 느낀 좌절감을 토로했다.


출생에서부터 서거까지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에는 자서전의 집필 시점인 고인이 회고록 초안을 위해 메모를 시작하는 서거 직전의 상황을 담고 있다.

1부 ‘출세’는 출생에서부터 부산상고에 입학해 공부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부에서는 권양숙 여사와의 연애와 결혼 일화도 소개됐다. 고인은 “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게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던가 싶다”고 회고했다. 또 사법고시 합격 일화와 함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나도 아내도, 그 순간만큼 큰 성취감과 행복을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그때만은 못했다”며 당시의 소감을 이야기했다.

2부 ‘꿈’은 부림사건을 맡은 이후 민주화운동에 헌신하게 된 이야기부터 정치에 입문해 민주당에서 대통령후보로 경선에 나서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여기에서는 일약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던 5공비리특위 청문회 이야기가 담겨있다. “정경유착의 실상을 파헤치고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증인 심문을 했다. 정주영 회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봐주지 않았다. 온 국민이 보는 가운데 당당하게 ‘나는 시류에 따라 산다’고 말했던 정주영회장의 말문이 막혔다. 결국 바른 말하는 용기를 가지지 못했던 것을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대북 특검시 ‘통치행위론’ 좌절 비화

3부 ‘권력의 정상에서’는 200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경선에 나서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전했다. 2002년 대선,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당시 4대 권력기관장을 포함한 내각 절반, 정부 산하단체와 공기업 기관장 절반의 인사권에 대한 구두 약속을 노 전 대통령이 거절하자 김원기 고문이 “후보가 구두 약속했다고 정몽준 후보한테 거짓말을 하겠다”고 한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 일화를 통해 “대통령 후보가 거짓 술수를 허락하라는 말입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이 되어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실패한 대통령이 되느니 차라리 실패한 대통령후보로 남겠습니다”하며 화를 냈다고 전했다.

대북 송금 특검에 대해선 “대북 송금이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견해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했다”며 검찰 수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논거인 ‘통치행위론’을 내세우고 싶었으나 좌절된 비화도 공개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4억 달러 문제를 사전에 보고받지 않아 몰랐다고 하셨다. 대통령이 한 일이 아니라고 했으니 ‘통치행위론’을 내세우는 데 필요한 논리적 근거가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4부 ‘작별’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가 새로운 꿈을 꾸고 실패한 후 서거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에필로그에서는 정리자인 유시민 전 장관이 노무현 서거 이후 상황을 정리했고, 문재인 노무현재단 상임이사가 감사의 말을 썼다.


유 전 장관 “꿈 많았던 청년의 죽음”

이 자서전은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유시민 전 장관의 손을 거쳐 출판됐다. 노 전 대통령 안장식 직후 ‘봉하전례위원회’가 유족들의 동의를 받아 유 전 장관에게 자서전 정리 집필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유 전 장관은 2009년부터 8월부터 2010년 2월까지 꼬박 6개월 동안 정리 작업에 매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서전은 고인이 남긴 저서와 미발표 원고, 메모, 편지와 각종 인터뷰 및 구술 기록, 유족과 지인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출생과 서거까지 일목요연하게 시간 순으로 정리됐다. 특히 고인이 남긴 여러 기록들 중 퇴임 후 서거 직전의 미완성 회고록 노트를 기본으로 문체를 통일하는 작업도 거쳤다. 유족과 재단 관계자들, 그 밖에 고인을 가까이에서 지켜봐온 지인들의 검토를 통해 사실관계를 철저히 확인, 오류 가능성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이런 노력을 통해 나온 ‘운명이다’는 ‘대북 송금’ 특검 사건 관련 배경 등 처음 공개되는 이야기가 많아 이목을 끌었다. 또 어린 시절부터 서거 직전까지 삶 전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들에 대한 고인의 솔직한 심경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유 전 장관은 “2009년 5월 23일 우리가 본 것은 ‘전직 대통령의 서거’가 아니라 ‘꿈 많았던 청년의 죽음’이었을런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