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 자서전 <성공과 좌절> 출간

미완의 회고록 노 전 대통령의 못다 이룬 꿈

2009-10-06      기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미완의 회고록이 출간됐다. 서거 며칠 전까지도 집필했었다고 알려진 회고록 <성공과 좌절>은 총 2부로 나눠 1부에는 자신이 직접 작성했던 회고록이 담겨 있다. 2부는 지난 참여정부 5년간의 기록과 퇴임 이후의 봉하마을 생활 등을 담고 있다. 여기에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노 전 대통령이 직접 회고록의 목차와 대강의 구성을 200자 원고지 90매 분량으로 쓴 글이다. 회고록에서는 이를 1부에 담고 자신의 실패 이야기를 쓰는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자서전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이 끝까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며 못다 이룬 꿈이 무엇인지 알아봤다.

“회고록은 한참 후에 쓰려고 했다. 아직 인생을 정리하기에는 너무 이르고,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봉하마을 가꾸기, 시민광장, 정책 연구…. 그래서 ‘우공이산’을 표구하여 붙여놓고 이런저런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장애가 생겼다.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 마침내 피의자가 되었다. 이제는 일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지난 이야기를 쓰는 일뿐인 것 같다. 왜 써야 할까?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다. 일은 삶 그 자체이다.”(<성공과 좌절>, 16쪽, 최종 수정일: 2009년 5월 20일 오후 5시 5분)

퇴임 후 노 전 대통령은 고향 봉하마을로 떠났다. 떠난 노 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은 많은 국민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자신의 형 노건평씨의 비리 의혹이 불거지면서 평화롭던 봉하마을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이후 측근비리의혹이 잇따라 터지면서 노 전 대통령을 옥죄었다. 시골의 한 촌부로 남고 싶었던 노 전 대통령은 결국 검찰 조사를 받고 난 후 자신의 몸을 부엉이 바위에서 던지고 말았다. 이 회고록에는 서거 직전까지의 노 전 대통령의 심경과 지난 참여정부의 과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정치를 하면서 이루고자 했던 나의 목표는 분명히 좌절되었고 시민으로 성공하여 만회하고 싶었으나, 이제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말았다”며 당시 심경을 고백했다. 하지만 자신의 실패가 진보와 민주주의의 좌절은 아니라며 충고의 말도 남겼다.

노 전 대통령은 “여러분은 여러분이 할 일이 있고, 역사는 자기의 길이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특히 회고록 여기저기에는 노 전 대통령이 성공과 좌절을 겪을 때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성공과 영광의 기억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의 기억들이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라는 덕담들...무엇이 성공한 대통령일까.”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실패담에 대해 묵묵히 인정을 했다. 하지만 이는 곧 역사의 뒤안길에 저물어가는 자신의 실패담을 거울삼아 후대에는 더 이상 시행착오를 겪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통령 임기 내내 나는 경제 파탄, 민생 파탄, 총체적 파탄, 잃어버린 10년, 이런 평가를 하는 사람들과 싸웠다. 말년이 되면서 나는 정치적 좌절을 이야기했다. 시민으로 성공하여 만회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제 나는 인생에서 세속의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는 무엇, 분별을 넘어서는 깨달음이라도 구하고 싶다.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실패 이야기를 쓰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온 국민의 봉하마을은 지난 해 노 전 대통령의 친형 노건평씨가 구속되면서 인적 드문 곳으로 바뀌었다. 이후 많은 언론들은 봉하마을로 집중되었고 이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은 상당한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다음 글에서 이를 잘 확인 할 수 있다.

“산다는 것이 뭘까? 안방에서 걷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뒤로 돌아 다시 하나, 둘……. <빠삐용>이라는 영화에서 본 장면이 생각난다. 기자들 때문에 마당에도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엊그제 뒤뜰에 나갔던 모습이 조선일보 카메라에 잡혔다고 한다. 일 킬로미터가 넘는 산꼭대기에서 망원카메라로 잡은 사진이란다.”

“저의 집은 감옥입니다. 집 바깥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저의 집에는 아무도 올 수가 없습니다. 카메라와 기자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도, 친척들도, 친구들도 아무도 올 수가 없습니다. 신문에 방송에 대문짝만하게 나올 사진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상한 해설도 함께 붙겠지요.”

회고록 2부에는 자신의 정치인생과 참여정부 임기 동안의 일들을 자세히 기록했다. 특히 대선 경선 당시 불거졌던 장인의 좌익논란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은 “나는 사실 결혼하기 전만 해도 장인에 대한 이야기를 몰랐다. 면사무소 서기를 했다는 것과 해방 이후 좌익 운동에 가담했다는 정도였다. 그런데 선거운동 기간에 장인이 6.25 당시 인민군이 내려올 때 면책임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연좌제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지 못하고 취직을 못한다는 것에 반감이 일었다”고 회상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언급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은 해외와 국내에서 국보급 대전을 받을 만한 지도자다. 지역분열을 막아내지 못한 책임도 있지만 그래도 훌륭한 지도자”라고 평했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만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인상에 대해선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이다. 국정 전반을 아주 소상하게 꿰고 있었고 자신의 소신과 논리를 아주 분명히 체계적으로 표현한다. 융통성도 있어 대화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밖에도 참여정부 시절 논란이 됐던 부동산 정책, 이라크 파병 문제, 경제 위기설 등에 대해서도 언급을 빼놓지 않았다.

일부에서 제기했던 대통령의 자질 문제에 대해 “나는 교양이 없다. 대통령이 될 줄 알았으면 미리 연습을 하는 것인데 체질적으로 허리를 잘 굽히는 편이다. 말은 위엄 있게 행동은 기품 있게 할 필요가 없는 환경 속에서 살았다. 준비 안 된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다른 점에 있어서는 승복하지 않지만 언어와 태도에서는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했던 점은 있다”며 참여정부 시절 말 많던 행동에 대해 이유를 밝혔다.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였던 탄핵과 관련해서도 노 전 대통령은 불행하거나 고통스러운 시기는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열린 우리당 창당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탄핵 때는 담담하게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행하거나 고통스럽지 않았다. 탄핵을 규탄하고 나를 지지하는 촛불시위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 창당은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지역정당을 벗어나 전국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었다. 현실적으로 민주당에서 전국정당을 만드는 노력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후보일 때 다른 후보와 내통하면서 해당행위를 했던 사람들이 당선된 이후 당의 개혁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4개월. 한 권의 책과 함께 홀연히 몸을 던진 노 전 대통령. 이제 그가 이루지 못한 꿈과 민주주의는 회고록 <성공과 좌절>에 고스란히 담겨져 후세에 전해지게 된다. 책을 통해 그가 못다 이룬 꿈이 무엇이며 그의 진심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정리=인상준 기자] sky0705in@dailysu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