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광공사 추천 1월의 가볼만한 곳 [3]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

잠시 여기 서서 한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보세요

2011-01-10     최은남 기자

사위가 고요하다. 2시간여 오르니 시야가 툭 터진다. 선작지왓 평원이다. 사시사철 다른 맛인 제주 한라산은 1월 이맘 때 쯤이면 눈부신 ‘설국’으로 탈바꿈한다. 드넓은 평원에 하얀 눈이 가득하니 새해맞이 산행지로는 아주 제격이다. 선작지왓 평원은 국내에 흔치 않은 고산 평원이다. 평원 가운데 놓여 있는 안내 글이 눈에 띈다. “잠시 여기 서서 한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보세요.” 평원 끝에 새하얀 구름이 일자로 놓여 있어 바라보는 시선과 수평이다. 노루 서식지인 ‘산상의 정원’에 걸맞은 풍경이다. 평원으로 오르는 가장 빠른 코스인 영실 코스는 ‘신들이 사는 곳’이라는 이름답게 발길 닿는 곳곳마다 ‘하로산또’(한라산 신)가 머무는 듯한 신비감이 느껴진다. 영실 코스가 끝나는 곳에는 윗세오름 대피소가 있다. 대피소 매점에는 1월 ‘설원 트레킹’을 즐기러 온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컵라면이 수북하다. 가족, 친구 단위로 옹기종기 모여앉아 먹는 모습이 정답고 따스하다. 어리목 탐방로로 내려오는 길에 마주하는 만세동산과 사제비동산 또한 눈이 시릴 정도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1700m 고지에 있는 이 선작지왓 평원은 말 그대로 눈 세상이다. 제주 말로 ‘선’은 서있다, ‘작지’는 돌, ‘왓’은 밭을 의미하니 선작지왓 평원은 ‘작은 돌들이 서 있는 밭, 들판’인 셈이다. 하지만 겨울철이 되면 돌은 온데간데없고 새하얀 눈과 거친 바람뿐이다. 거친 바람도 명품이다. 살을 에는 듯이 모진 삭풍이 아니다. 볼을 스치는 바람이 시원스럽다.

선작지왓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고산 평원이다. 눈 없는 계절에는 갖가지 야생화가 철따라 피어난다. 겹겹이 쌓여 있는 눈 아래에는 제주조릿대를 비롯한 300여 종의 식물이 찬란한 봄날을 그리며 숨죽여 지내고 있다. 선작지왓 평원은 선한 눈망울을 가진 노루들이 뛰노는 ‘산상의 정원’이기도 하다. 평원 끝에는 반듯한 수평선을 그린 구름바다가 광활하게 펼쳐진다. 등산로 옆에 세워진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잠시 여기 서서 드넓은 초원을 바라보세요. 한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보세요.”

한라산에는 어리목, 영실, 돈내코, 성판악, 관음사 등 5개의 등산코스가 개방돼 있다. 그중 성판악, 관음사 코스만 한라산 정상에 오를 수 있고 나머지 코스는 해발 1700m대의 윗세오름 대피소까지만 오를 수 있다. 하지만 한라산의 아름다운 설경과 화사한 눈꽃을 감상하기에는 영실, 어리목 코스를 권할 만하다. 특히 선작지왓 평원을 가로지르는 영실 코스는 가장 짧은 코스여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다. 등산기점인 영실휴게소에서 윗세오름대피소까지 3.7km에 불과해서 겨울철에도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 등산객들이 이따금씩 눈에 띈다.

‘신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의 영실(靈室) 코스는 발길 닿는 곳곳마다 ‘하로산또’(한라산 신)가 머무는 곳처럼 신령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영실탐방안내소에서 영실휴게소까지 2.4km 거리의 찻길은 둘레길 마냥 걷기 편하다. 영실휴게소를 지나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아름드리 소나무숲을 지나면 몹시 가파른 비탈길이 시작된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쯤이면 영실기암을 만나게 된다. 해발 1400m에서 1600m 사이에 분포하는 영실기암의 괴석들은 형태에 따라서 오백나한, 비폭포, 병풍바위 등 다양한 이름이 붙여져 있다.

영실휴게소에서 1.5km 거리의 병풍바위를 지나서부터 만나는 풍광 또한 절경이다. 지구상에서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구상나무 군락지가 펼쳐진다. 매서운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대기 때문인지, 나무들마다 한쪽 방향으로만 무성하게 가지를 뻗은 점이 특이하다. ‘살아 백년 죽어 백년’이라고 표현되는 구상나무는 해발 1400m이상의 고산지대 2600만㎡ 면적에 드넓게 분포한다.

구상나무 군락지 사이로 들어서기 전에는 한번쯤 뒤를 돌아봐야 한다. 눈꽃이 하얗게 핀 영실기암 옆으로 서귀포 해안이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지나온 등산로 너머로는 봉긋한 산방산과 제주 서남부 바다가 아스라이 보인다.

등산로는 구상나무 군락지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진다. 나뭇가지마다 눈발이 그대로 얼어붙어 나무인지 눈 조각품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구상나무 군락지부터는 상대적으로 걷기 편한 평지이다. 그곳을 벗어나면 곧장 선작지왓 평원이 펼쳐진다. 눈길의 부드러운 감촉을 음미하며 선작지왓 평원을 가로질러 노루샘을 지나면 어느덧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한다. 해발 1700m대의 윗세오름은 ‘위에 있는 세 오름’이란 뜻이다. 백록담 아래의 붉은오름, 누운오름, 족은오름이 바로 그 세 오름이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는 간단한 요깃거리를 판매한다. 1월 ‘설원 트레킹’을 즐기러 온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컵라면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대피소 주변에는 사람들이 남긴 먹이를 노리는 까마귀들이 떼지어 날아든다.

윗새오름 대피소 쪽에서는 백록담에 오를 수가 없다.

훼손이 심한 서북벽과 남벽 방향에 자연휴식년제를 도입하여 탐방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하산하는 일만 남았다. 영실 코스로 되돌아가거나 돈내코 방면으로 하산할 수도 있지만, 길이 4.7km에 2시간쯤 소요되는 어리목 코스가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편안한 하산코스이다. 또한 한라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코스이기도 하다.

어리목 탐방로로 하산하는 길에 지나는 만세동산과 사제비동산도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답다. 더군다나 지형이 평탄해서 산책하듯 발걸음이 가볍다. 만세동산 전망대에서는 흰 눈으로 덮여 있는 백록담 화구벽에서부터 민오름, 장구목오름, 윗세오름, 망체오름 등의 오름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름 너머로는 제주시가지가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다시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서 2.4km 가량 내려가면 어리목 탐방안내소에 당도한다.

영실에서 어리목으로 이어지는 등산코스는 가족등반이 가능한 비교적 편한 코스이긴 하나 겨울 산행이다. 방한 복장과 아이젠, 간식거리는 반드시 챙겨야 한다. 등산로 주변의 샘터도 꽁꽁 얼어붙기 마련이므로 식수도 꼭 갖고 올라야 한다. 또한 낮의 길이가 짧은 겨울철이니만큼 탐방로별 입산통제시간을 미리 확인해보는 것이 좋다.

●문의전화
한라산국립공원 탐방안내소 064)713-9950

[최은남 기자] cen@dailypot.co.kr
사진·자료제공:한국관광공사